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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국 Aug 09. 2019

새하얀 톱날 위, 짐승은 붉게 물든다

알래스카 산맥 너머로 지는 태양



 차는 북으로 내륙으로 달렸다. 맑아지는 하늘에 차창을 열자 청량한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의 물기가 빠진 내륙의 공기는 가벼웠고 바스락거렸다. 짙게 해안가를 메우던 가문비나무며 솔송나무도 옅은 빛깔의 나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수해를 이루던 침엽수림이 느슨해지며 햇살은 나무 사이로 파고들었다. 바람은 햇살이 파고든 틈새로 스며들어 연주황빛 잎새들을 흔들었다. 햇살과 바람으로 나뭇잎의 물결은 출렁였다.


 알래스카 산맥은 이 땅의 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그 중심에 북미 대륙의 최고봉, 디날리 산(해발 6190m)이 파르라니 솟아 있다. 디날리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무수한 계곡들이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거대한 숟가락으로 퍼낸 듯 움푹한 골짜기들은 오래전 산맥을 덮고 있던 빙하가 바다를 향해 움직이면서 긁어내린 흔적이다. 깊고 길게 새겨진 땅의 눈물자국, 상흔의 고랑에는 이제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


  나는 디날리의 남동쪽 어느 골짜기로 차를 몰았다. 눈 덮인 알래스카 산맥의 봉우리들이 마주 보이는 골짜기 기슭에 내가 이날 머물 캠핑장, '크서이 켄'이 있었다. 나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캠핑장에 도착했다. 입구 표지판에 '크서이 켄'이라는 이름의 뜻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원주민 아타바스카 인디언 언어로 '오래된 존재의 기슭'이라는 뜻이었다.

Silhouettes - K'esugi Ken, Alaska - 2018.09.20


 붉게 물드는 태양이 날카로운 산맥의 끄트머리에 걸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서둘러 텐트만 쳐두고 사진기구를 챙겨 산등성이로 향했다. 설산과 선홍빛 하늘은 나무들의 실루엣을 검고 또렷하게 새겼다. 전망이 열린 공터에 다다랐다. 숨을 고르며 잦아든 입김은 차가워진 해 질 무렵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먼 아래로 몇 가닥 개울이 내려다보였다. 거리 감각이 사라져 개울인지 강인지 알 수 없었다. 고요히 흘러가는 물줄기 뒤편으로 수목의 바다는 깊고 아득했다. 눈 덮인 산맥은 검은 바다 너머 기다랗게, 새하얀 톱날로 떠올랐다.

 태양은 능선에 갈려 핏빛으로 젖어들었다. 낭자한 육신으로 가라앉았다. 산그늘이 내가 있는 곳까지 뻗어 왔다. 아주 오래된 존재가 하루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나는 이쪽 기슭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짐승이 잠에 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한숨을. 산그늘의 추위가 뼛속 깊숙이 스몄다. 나는 더 추워지기 전에 어둑한 오솔길을 따라 텐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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