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국 Nov 21. 2019

여우가 물고 간 카메라

호시노 미치오가 남긴 이야기



  미국에 있는 국립공원들의 크기를 순위로 매기면 1위에서 4위까지는 모두 알래스카에 있다. 1위는 랭겔 세인트-엘리아스 국립공원(Wrangell-St.Elias)으로 알래스카 동남쪽의 수많은 빙하들을 거느린 국립공원이며, 오늘 내가 깊숙이 들어가게 될 디날리(Denali) 국립공원은 그 목록에서 3위를 차지한다.


  페어뱅크스에서 다시 알래스카 산맥 방향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며칠 전 지나왔던 디날리 탐방 센터가 나온다. 내가 탈 버스는 오후 한 시에 탐방 센터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이곳의 버스들은 당일치기 여행객을 위한 관광버스와 국립공원 깊숙이 자리잡은 캠핑장들을 이용하는 이들을 위한 캠핑 버스로 나뉜다. 내가 탄 버스는 뒤쪽의 좌석들이 텐트 등 짐들을 싣기 위해 들어내어진 캠핑 버스였다. 40년 넘게 여기서 운전을 하고 있다는 기사님은 백발의 노인이었고, 캠핑 버스에 탄 우리들은 여타 관광객들과는 다르니 동물 사진을 찍으러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미는 등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중간중간 디날리 산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버스는 잠깐씩 멈추었다. 우리는 짧은 산책을 다녀오기도 하고 주변의 사진들을 찍기도 하며 조금씩 공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정의 중간쯤에는 스토니 힐(Stony hill)이라는 언덕이 있었다. 여기는 미치오가 호기심 많은 여우 한 마리를 만났다는 곳이다. 당시 미치오는 주변의 산등성이를 오가는 늑대 무리를 촬영하기 위해 스토니 힐 기슭에 텐트를 치고 며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텐트로 다가왔는데, 삼각대에 설치해 둔 미치오의 카메라를 툭툭 건드리더니 주둥이로 카메라 끈을 물어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카메라를 뺏길 순 없다고 생각한 미치오는 여우를 쫓아간다. 그러나 미치오가 그를 잡으려 달리기 시작하면 여우 또한 달려서 멀어지고, 미치오가 지친 나머지 걷기 시작하면 여우 또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언덕들을 오르내리며 반복된 추격전은 해가 질 무렵, 석양을 잠시 바라보던 여우가 카메라를 자리에 놓고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1996년 8월 8일, 미치오가 캄차카 반도의 쿠릴 호반에서 불곰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그의 아들은 두 돌이 채 안되었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에 실린 미치오의 마지막 원고에는 삶을 소망하는 미치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미치오는 아들이 조금 더 크면 오키나와의 따뜻한 바다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다. 오키나와에서 그는 아들에게 정말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스토니 힐에서 만난 한 여우의 이야기의 끝은 그가 아들에게 건네고자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첫 문장이다.


"언젠가 내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겠지요. 옛날에 말이야, 여우 한 마리가..."




이전 08화 삼만 육천 년 전의 스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