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나의 목적지는 원더 레이크(Wonder Lake)라는 캠핑장이었다. 원더 레이크는 디날리 산과 가장 가까운 캠핑장이자 국립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종착점이다. 그 너머로는 문명에 밟힌 적 없는 대지가 베링 해협에 이르기까지 망망한 삼림과 산맥으로 펼쳐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처음 맡아보는 서늘한 냄새가 숨길 깊숙이 빨려 왔다. 차가운 바닷물의 냄새 같기도 했고 노랗게 익어가는 은사시나무들의 냄새 같기도 했다. 원더 레이크에는 28개의 캠프 터가 있는데 모두가 남쪽을 바라본다. 그쪽으로는 완만한 내리막이 이어지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개울에 가 닿는다. 개울 바로 뒤편으로부터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괴가 육중하게 솟아오른다. 우뚝 솟은 새하얀 덩어리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빙하들이 덮어버린 어느 거인의 머리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릴 적 나는 북미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알래스카에 있는 맥킨리(McKinley) 산이라고 배웠다.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산악회 사람들이 디날리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도 나는 디날리와 맥킨리 두 이름이 같은 산을 가리킨다는 걸 알지 못했다. 디날리라는 이름에는 산과 강, 눈과 바람을 오랜 시간 지켜봐온 거대한 존재의 모습과 그것을 자신을 기념하는 용도로 활용하려 했던 인간의 욕망이 포개져 있었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코유콘 아타바스카(Koyukon Athabaskan)인들은 수천 년 동안 이 산을 디날리, 그들의 언어로 '높은 자(the tall one)'로 불러왔다. '높은 자'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시 알래스카에 금을 캐러 온 한 미국인이 대통령 후보였던 윌리엄 맥킨리를 응원하고자 산의 이름을 맥킨리라고 부르면서부터다. 맥킨리는 이듬해 선거에서 우승하여 대통령이 되지만 공식적인 산의 이름을 정하지는 않는데, 수년 후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우드로우 윌슨이 북미 대륙 최고봉의 이름은 맥킨리라고 공표한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또 다른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은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을 기념하고자 이 산의 두 봉우리를 '처칠 봉우리(Churchill peaks)'로 이름붙이기도 한다.
한편 알래스카의 원주민들과 새로 알래스카에 터전을 잡고 이곳에서 세대를 이어온 미국인들은 꾸준히 이 산을 디날리라고 불러왔다. 알래스카의 생태를 연구한 생태학자들 또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름에 경의를 표해왔는데, 디날리 산군에서 새로운 종(種)을 발견할 경우 그 이름 끝에 디날리 혹은 디날리엔시스를 붙인 것이다. 혹독한 기후 속에서 자랄 수 있는 식생이나 동물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막상 디날리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모기나 톡토기, 나비, 개망초, 개양귀비 같은 지극히 작은 것들이었다.
실제로 알래스카 주의회에서는 연방 기관인 미국지명위원회에 이름을 바꾸어달라고 1975년도에 요청을 한 적이 있으나 오하이오 출신 국회의원 한 명의 반대 때문에 이는 실패하고 만다. 당시 그 국회의원의 지역구는 윌리엄 맥킨리의 고향인 칸톤 시(市)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이며 웅장한 묘원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묘원의 형태인데, 잔디 언덕 위로 널찍하게 난 화강암 계단 끝에는 마찬가지로 화강암으로 된 30미터 높이의 흰색 돔형 건물이 말라붙은 젖꼭지처럼 튀어나와 있다. 인간이 기념을 표하는 이토록 비루한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기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결단이 중요했다. 디날리와 맥킨리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고 통일된 하나의 이름 디날리로 부르게 된 것은 불과 4년 전, 당시 대통령이던 버락 오바마가 알래스카를 방문하면서였다.
사진 출처 : nps.gov
눈앞의 디날리 산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조용히 서 있다. 여기서는 텐트에 누워서도, 벤치에 앉아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가만히 산을 쳐다보게 된다. 나는 이튿날 아침 단엽기로 디날리를 둘러보는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근처의 칸티슈나(Kantishna) 활주로를 찾았다. 작은 개울을 건너는데 조그만 표지판에 말코손바닥사슴의 개울(Moose's Creek)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개울의 소유주는 말코손바닥사슴인 걸까.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걸까. 어떤 사람이 여기에 표지판을 세워 두었을까. 여러 생각에 빠진 채 물이 흘러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수컷 말코손바닥사슴 한 마리가 개울 가운데 서 있었다. 검고 단단한 발목 주변으로 물살이 가볍게 스쳐가는 것이 보였다. 물끄러미 디날리 산 방향을 바라보던 말코손바닥사슴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