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도 가끔 포도맛 치약이 필요해

by 괜찮은사람

독립을 한다는 것은 이전에 누군가로부터 챙김(혹은 강요) 받았던 것들을 스스로 챙김으로부터 시작한다. 첫 자취에서 벌크로 가장 무난한 치약을 사두고는 이사 때까지도 쓰지 못했던 것이 치약이었다.


엄마는 Extra strong 매운 치약을 사두곤 했다. '비싸고 고급인' 치약은 나뭇잎사귀 같은 게 그려져 있는 용기에 담겨있었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그 치약을 쓰면 거짓 없이 눈물이 떨어지기도 했다. 혀가 얼얼해서 양치질을 하는 시간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쓰다 남은 치약이야'라는 명분으로 다른 치약을 거실 화장실에 꽂아두었을 때 엄마는 내게 '왜 좋은 거 두고 그걸 쓰니'라고 핀잔을 줬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또 매운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고 눈이 벌게져서 화장실을 나오곤 했다.


독립할 때 매트리스에 옷 몇 벌 덜렁 들고 나왔더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사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시급한 것이 치약이었는데 어른용(?)으로도 'Fruit'라고 쓰인 샤인머스켓향 치약을 발견했다. 패키지도 연핑크에 초록이 감각적인 조화를 이뤘다. 홀린 듯이 치약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치약을 칫솔에 짤 때 향긋하고 달큼한 청포도 향이 기대감을 올렸다. 더 이상 혀가 캡사이신+마라 콤보에 절여진 듯 아프지 않았다. 3n 년만의 과일치약과의 조우였다. 이사 온 지 한 달 반이 지나서야 고춧가루를 살 정도로 맹맹한 식단을 먹고 있었다. 뭐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매운 떡볶이를 들이켜던 시기의 나와는 정반대로. 짜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면 머리털이 곤두섰기에 '하얀'음식 위주로 먹다 보니 과일치약이 꽤나 적절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어른의 치약은 대부분 '쿨'하거나 '매운'맛이다. 하지만 가끔 어른에게도 달콤한 치약이 필요하다. 그건, 꽤나 가성비 좋은 위안과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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