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사람

by 괜찮은사람

한 달 동안의 자의적 타지살이가 끝났다. 시작할 땐 장소와 내가 남을 것 같다 생각했는데 결국 남는 건 둘 다 아니었다. 그 장소와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추억이라고 하기엔 낯간지럽고 일상적인 시간이라)이었다. 물론 좋은 기억만 남진 않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의 유형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녀는 말투가 느렸고 행동에 여유가 느껴졌다. 모두가 퀴즈를 맞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카드를 수집하는데 몰두할 때도 그녀는 천하태평이었다. 뭐랄까, 그 알 수 없는 여유에 끌려 나는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느리고 여유 있고 빈틈이 있는 숨 쉴 공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 '네 생각대로 되게 두진 않을 거다'라는 가르침을 내려주듯, 내 예상은 정반대로 빗나갔다.


인도에서 나란히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반대입장이 되어 마주 오는 사람으로 느낀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앞서거나 뒤처지는 편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자석처럼 내 옆에서 묘하게 나를 반대편으로 몸으로 밀어냈다. 우연이겠지라는 생각은 반복되는 패턴에 사라졌다. 내가 누군가 혼자 걷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면 집요하게 따라붙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에게는 친근감의 표시였을지 모르는 그 행동들이 나에겐 묘한 침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1인 1실을 사용했는데 그녀에게 내 생필품을 나눠주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누군가 내 숙소에 오는 것이 싫어 같은 층 복도에서 주겠노라 얘기를 분명히 했다. 그렇게 하고 나는 저녁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기 전에 밀린 단체채팅방을 보는데 '@'다음에 내 이름이 선명히 붙은 채팅이 목에 턱 하고 걸렸다.


'00이 몇 호였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누구도 답장하지 않았고 나는 마치 한 적도 없는 약속을 파투 낸 것 같은 찝찝함과 함께 잠들었다. 결국 다음 날 그녀는 기어코 내 방에 찾아왔고 중문너머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잘 정리해 놨네'라는 식의 수요 없는 평가를 마치고 유유히 화장실까지 쓰고 내 방을 떠났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뻔뻔하고 무감각한 척을 잘해서 나중에 결국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 마치 내 친모처럼.


10명이라는 규모여서 어쩌다 같은 테이블을 쓸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다리를 길게 상대편 자리까지 뻗거나 꼬고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발자국을 남기곤 했다. '어머 미안'하고 말은 했지만 다리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개인 일을 보느라 헐레벌떡 뛰어간 송별회 자리에서 남은 자리가 그녀의 맞은편뿐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녀의 다리는 이미 빈자리의 바닥까지 침범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발을 피해 의자를 쭉 빼서 뒤로 앉아서 숨을 골랐다. 나이나 하는 일 등 사적인 질문을 공적 자리에서 던져 공론화시키는 것도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는데. 그 때문에 나는 원치 않게 나이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강제 신비주의 참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추억 가운데

잊지 못할 빌런이 한 명 추가되었다.


나는 마주 앉은 사람을 위해 다리를 접는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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