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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비 Dec 27. 2022

‘배려가 없는 평화주의자’도 이웃입니다

물과 기름 같은 나와 너, 액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다양한 이웃들을 마주해 보세요’


안내말 아래로 다양한 직업, 성격을 가진 이웃이 나열돼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버릇없는 대학생부터 밤길이 무서운 이장님, 배려가 없는 평화주의자까지 이런 이웃도 있을까 싶은 이들이 줄줄이 보였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며 새로울 것 없는 이들과 교류하는 내게는 꽤나 신선한 시각으로 다가왔다.


젤리장 × 띵크앤메이크의 <랜덤 이웃>


혜화역 근처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일시적 개입’에서 공공캠페인 활동 팀인 젤리장 × 띵크앤메이크가 선보인 <랜덤 이웃>이다. 다양한 수식어와 명사가 적힌 네임카드가 있고 관람객이 자유롭게 이들을 뜯어 조합해 벽에 붙이는 관객 참여형 전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이들이 있고, 이들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라는 작품의 메시지가 선명하면서도 위트 있게 전달되는 게 마음에 꼭 들었다.


예펜 하인의 <나와 함께 숨을>
예펜 하인의 <나와 함께 숨을>


이 메시지는 전시회 일시적 개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덴마크 출신 아티스트 예펜하임의 호흡을 시각화한 <나와 함께 숨을>은 호흡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나의 호흡은 내가 살기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개별적이지만, 모든 생명체가 살기 위해 호흡을 한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호흡을 통해 우리 모두의 보편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호흡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다. 나와 너를 구분 짓고 우리와 너희를 편 가르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권은비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와 〈붉은 비누〉, 〈빨래〉 프로젝트.
권은비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와 〈붉은 비누〉, 〈빨래〉 프로젝트.
권은비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와 〈붉은 비누〉, 〈빨래〉 프로젝트.


시의성 짙은 작품도 눈에 띄었다. 권은비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와 〈붉은 비누 1〉, 우크라이나 전쟁 후 한국으로 이주해온 구소련국가의 여성들과 함께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한 〈빨래프로젝트 2〉와 〈붉은 비누 2〉가 그렇다. 이주와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불안이 씻겨 나가기를 바라면서 비누를 만드는 작품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김현주 × 조광희의 의정부 기지촌 ‘빼뻘’
김현주 × 조광희의 의정부 기지촌 ‘빼뻘’
김현주 × 조광희의 의정부 기지촌 ‘빼뻘’


의정부 기지촌, 이른바 ‘빼뻘’과 이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한 김현주 × 조광희의 <빼뻘 아카이브> , <빼뻘-시공을 몽타쥬하다>, <뺑 뺑뻘 빼뻘>, <낭독의 방 -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은 뚜렷한 이미지와 메시지가 돋보였다. 김현주, 조광희는 빼뻘에 머물며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현장에서 작품 활동도 진행했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이번 전시회 명칭이 일시적 개입이 됐다고 한다.


전시를 다 보고 일시적 개입을 내 멋대로 해석해 봤다. 물과 기름처럼 도무지 섞일 것 같지 않은 나와 너지만, 기꺼이 우리가 서로 한 발을 내디뎌 서로의 삶에 일시적 개입을 한다면, 적어도 우리 모두 액체라는 공통분모 하나쯤은 찾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를 이번 전시가 던지는 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번 전시를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배려가 없는 평화주의자’도 이웃입니다


전시, 일시적 개입은 내년인 2023년 1월21일까지 혜화역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다. 운영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매주 월요일 및 1월1일은 휴관일이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일시적 개입 출입문 전경
혜화역 마로니에 광장 정면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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