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사과부터 하고 시작하겠다. 거짓 하나를 고한다. 서른 들어 난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다. 특히 “어떻게 지내요?”, “어땠어요?”라고 물어봤던 이들에게 사과드린다. “잘 지낸다”, “재밌다”, “즐겁다”며 좋은 척했던 거 모두 자본주의 미소, 대답이었다. 예민한 몇몇은 ‘영혼 없다’고 지적했는데 정확하게 봤다. 당신의 선구안, 짝짝짝, 인정한다. 영혼 없다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서른 중반, 인생 노잼이 찾아오니 거짓말같이 웃음이 사라졌다.
한때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라 입 꼬리가 절로 씰룩대고, 횡격막이 연신 오르내리고, 눈물까지 찔끔 나올 수밖에 없던 웃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사라진 웃음을 대신한 건 ‘자본주의 미소’다. 눈과 입은 웃는 척했지만 진짜 나는 웃지 않고 있었다. 내 웃음소리는 ‘허’가 고작이었다. 자연스러운 웃음소리라면 ‘허허허’ ‘하하하’ ‘호호호’ ‘크크크’ 등 단음절이 수차례 반복돼야 하지만 내 웃음소리는 ‘허’ 딱 한 음절뿐이다. 단말마 비명 ‘악!’과 닮은꼴이다.
나면서부터 내 웃음이 비명과 닮았던 건 아니다. 난 웃음이 많았다. 아니 헤펐다. 십 대, 이십 대 적에는 웃다가 배에 경련이 왔다. 제대로 숨을 못 쉴 정도로 웃기도 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난 웃다가 뒤로 넘어진 적도 있었다. 십 대, 이십 대 당시 내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웃기도 잘 웃었고 웃기기도 잘 웃겨서였다. 웃음 자판기라고나 할까. 누가 날 쿡 하고 누르면 곧잘 농담도 잘 해댔고, 남들의 실없는 소리에도 쾌활한 웃음으로 답해줬다.
웃음만 넘쳤던 건 아닌 것 같다. 대체로 모든 감정이 과잉이었다. 즐거움, 기대감, 설렘, 행복, 슬픔, 우울, 좌절감 등등. 군대에서는 전역을 두 달여 앞두고 여자 친구한테 차인 후 한 달가량 잠을 못 잤던 것도 같다. 하루 한두 시간 자는 게 고작이었고, 밥은 한 끼에 한 숟갈이 고작이었다. 하루에 밥 세 숟가락 먹고 잠은 한두 시간만 잤다. 그렇게 한 달 만에 10킬로그램이 빠졌다. 유선전화기가 주르륵 늘어져 있던 대대 복도에서는 친구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다가 소리 내 울기도 했다. 말년 병장이 대대원이 다 보는 곳에서 이러기란 쉽지 않다. 이때는 제발 감정이 좀 둔감해지기를 바랐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감정은 나이가 들며 빠르게 무뎌졌다. 관절이 닳는 속도보다 빠른 듯했다. 아직 관절은 쓸만했지만 감정이란 놈은 웬만한 사건, 사고에 도통 반응하지 않았다. 즐거운 일이 생겨도 즐겁지 않았고 슬픈 일이 생겨도 슬프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세월이 흐르면서 감정이 무뎌졌다. 어느 순간부터 이미 다 겪어 본 일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 만남의 설렘, 첫 이별의 아픔, 첫 시작의 긴장, 첫 마감의 만족은 그때뿐이었다.
만남이든 일이든 반복될수록 뻔한 ‘패턴’이 보였고 새로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태가 자리 잡았다. 서른 중반이 되며 이 속도는 더 빨라졌다. 감정도 덩달아 자취를 감쳤다. 사무적인 태도만 남게 됐다. 그렇다. 서른 중반이 되며 난 한때 그토록 바라던 무신경함을 갖게 됐다. 이상한 건 바라마지 않았던 무신경함을 가졌지만 기쁘지 않았던 점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인 척 꾸미지만, 막상 어른의 나이가 되고서는 무덤덤해지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랄까. 오히려 더 어리게, 중고등학생으로 봐주길 바라는 심정과도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주변 또래 대부분도 나와 같다. 마치 단체로 웃음 실종 증후군을 앓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또래끼리 모이면 굳이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기에 자본주의 미소조차 짓지 않게 된다. 최근 만남을 하나 소개하자면 이렇다. 또래 친구와 만나면 가볍게 안부를 묻는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대화는 금세 끊긴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누군가가 “최근에 재밌는 일 없어”라고 물어본다. 또다시 침묵.
그나마 성격 밝은 친구 하나가 “아! 있어”하며 얘기를 꺼낸다. 다들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다가 금세 시큰둥해지고 만다. 특히, 친구 본인 얘기가 아니고 연예인이나 잘 나가는 누군가의 가십이면 반응은 냉담해진다. 냉소적인 친구는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래”라며 무안을 주기도 한다. 웃자고 꺼낸 말에 죽자고 달려드냐고 한 마디 먹여준다. 모두들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낼 마음도, 들을 여유도 생기지 않게 된다. 부쩍 시계를 자주 본다. ‘누군가 제발 이만 가자’고 얘기해주기만 기다린다. 몇 번 겪었던 일이다.
만남의 끝이 썩 유쾌하지 않아도 난 곧잘 동갑내기 모임을 꾸렸다. 안도감 때문이었다. ‘너도 노잼이냐? 나도 노잼이다. 그래, 나만 유별난 일을 겪는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씩 다 재미없고 외로운 삶을 사는구나’하며 위로가 됐다. 그렇다. 서른 중반이 된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건 감정이 차츰 무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무뎌진 감정을 또래와 함께 확인하며 안도하는 게 서른 중반 인지도 모르겠다는 나름의 결론에 다다랐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갈수록 무뎌지는 감정을 그저 방치하고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일까라고 말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이를테면 서른 중반은 그냥 노잼일 수밖에 없는 걸까,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겪을 수밖에 없는 현상에 불과한 걸까, 감정은 대체 얼마나 무뎌질 수 있는 걸까, 다시 설렘, 희망, 기대, 긴장을 느끼는 건 불가능한 걸까라는 질문들 말이다. 십 대 때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 되고야 알게 됐다. 서른이 된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삼십 년 살다 보면 어른이 아니라 그냥 서른이 되는 것이었다. 점점 감정이 무뎌져 가는 서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