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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준 Jun 10. 2016

여행가는 불안하지 않은 게 아니다.

불안한 미래를 안고 떠나는 것이다.

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여행에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을 만나러 공항철도를 탔다. 텅텅 비어있을 줄 알았던 공항철도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캐리어와 배낭 가방보다 더욱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 안에 숨겨진 경계와 두근거림이었다. 가이드북을 펼치며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사람들의 대화는 한껏 고조돼있었다. 가고 싶은 장소, 먹고 싶은 음식, 하고 싶은 활동들을 하나 둘 씩 늘어놓으니 어느새 지하철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자주 타던 지하철의 낯선 풍경 속에서 다시금 여행의 냄새를 맡았다. 비행기에서 막 내려서 파리의 지하철을 탔을 때 그 흥분감과 긴장감, 내가 진짜 이곳에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하여 볼을 꼬집어 보지만 얼얼한 볼이 너무나 행복했던 몽환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에겐 일상이었지만 나도 이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찌든 사람들 사이로 초롱초롱하게 빛났던 나의 눈. 한국 지하철에 앉아있는 외국인들도 그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었다. 아 나는 일상 속에 있는 여행을 놓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여행이다. 더 넓은 세계를 본 사람과 만나는 것, 더 넓은 시야를 공유하는 것은 앉아서 떠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행이다. 어쩌면 이 야심한 밤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또 다른 여행을 떠나기 위한 하나의 통로인가 보다.

글을 쓰는데 자꾸만 외국인이 버스 노선도를 본다. 한국어로 쓰여있기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외국인은 아까 분명 "강나므 스테이션??"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논현역에서 내리려고 한다. 나는 외국인에게 다가가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딘지를 물었고 외국인은 강남역 5번 출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오리. 일본 도쿄에서 왔다고 했다. 이 밤에 어딜 헤매려고 혼자 강남을 왔나. 쳇 할 수 없이 데려다주는 수밖에 없겠다. 숙소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연신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길래 나도 도쿄에서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서 길 안내를 받았다고 하니까 씨익 웃으며 그래도 고맙다고 한다.

숙소에 바래다준 뒤, 여행에 미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1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들어갈 곳을 찾다가 우리는 근처 노래방으로 갔다. 얌전할 것 같은 사람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이 약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에 미친 사람들은 놀기도 잘 노나보다.

세 시간이 넘도록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지쳤다. 마침 서비스 타임이 끝나기도 했기에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소주와 맥주 사이에 사이다 한 캔은 가져다 놓고 쪼르르 따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다. 여행을 주제로 얘기를 하다 보니 얘기가 잘 통하기도 하고 성격들이 시원시원해서 참 좋았다.

밤새도록 꽃 피우는 이야기들이 어느덧 찾아온 아침 햇살에 잠잠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아 회사 가기 싫다." 그때 옆에서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야 그래도 백수보단 회사 다니는 게 낫지"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휴학생이나 졸업해서 쉬는 게 학교 다니는 것보단 훨씬 좋은 것 같아요."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일상에서의 답답함 혹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여행 중에는 적어도 내가 주인공이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여행 가고 싶다." 사실은 도망치고 싶다는 말의 낭만적인 표현일지도 모르는 이 말을 요즘 나는 입에 달고 산다.

여행의 무덤은 직장이다. 제 아무리 잘난 여행 가라고 해도 결국 나이가 들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대부분 여행을 떠나는 자들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나는 것을 무조건 손뼉 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년이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벌써 시작됐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이 세상을 여행하며 산다. 많은 사람들은 초중고등학교-대학교-군대-회사-치킨집을 주로 여행한다. 그 밖의 다른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야 너 인생을 허비하는 거야. 남들이 스펙 쌓을 때, 너는 놀러 다니기만 하면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하니? 그렇게 살면 인생 나중에 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떠난다. 떠나는 사람에게 미련이 없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스펙을 쌓는 대신 여행을 다니는 것은 겉으로는 쿨할 수 있어도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한 미래에 떨린다. 어쩌다가 밤이 되어서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다 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여행가는 불안하지 않은 게 아니다. 불안한 미래를 안고 떠나는 것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 누군가가 해결책을 갖고 있으리라 희망해보았지만 그 누구도 뾰족한 해결책을 갖고 있진 않았다. 다만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힘이 쭈욱 빠진 태양이 뜨고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우리는 건물 밖을 나와 콩나물국 한 사발을 말아먹고 작별인사를 했다. 피곤함이 몰려온다. 좀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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