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반경이 곧 나의 로컬이 되는 시대
정보 전달 방식은 어떻게 진화해 왔을까?
“정보(Information)는 본래 고대 라틴어에서 ‘informare‘ 유래하며,
‘in-‘은 “안으로”(into), formare는 “형태를 만들다”(to form)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무언가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보는 단순한 데이터의 나열이 아니라,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서라고 생각한다.
정보를 전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어왔다.
또한, 사람들이 정보를 어떻게 접하고, 누구를 믿고,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에 따라 삶의 풍경도 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이 처음으로 정보와 ‘실시간’으로 연결되었다고 느꼈던 매체는 라디오였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대, 라디오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전황 소식, 가족 찾기 방송, 국가 지도자의 목소리 등,
지금 이 순간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특히 88 서울올림픽은 컬러 TV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안방을 하나로 연결했다.
정보는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다시 말해 감정과 상상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눈으로 확인하는’ 신뢰 중심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방송은 점점 설명하지 않고, 연출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 모뎀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시대가 열렸다.
“끼릭…끼릭…빠르르릉!” 하는 접속음과 함께 켜던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는 인터넷의 문을 열어줬다.
속도는 느렸지만, 익명의 닉네임으로 서로 글을 주고받던 그 시절은
정보가 권위자에게서 대중으로 흘러가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2000년대 초, ‘검색창’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다.
다음, 네이버가 뉴스와 지식의 문을 열어주며
정보는 더 이상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내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피로해졌고,
결국 다시 “누가 말하느냐”에 집중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정보를 소비하지 않고, 사람을 구독한다.
언론사보다 기자 개인의 채널을 보고, 브랜드보다 창업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결국 정보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
그리고 ‘그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영향력을 가지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지역 신문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어디서 세상을 읽는가
인터넷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정보는 국경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글을 다 알게 되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느꼈으니까.
서울에서든 제주에서든, 런던이나 상파울루든, 모두가 동시에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 있다.
바로 지역 신문이다.
미국에서는 2004년부터 2017년 사이에만 약 1,800개 이상의 지역 신문이 폐간되었다고 한다.
한국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지방신무이나 지역 방송은 점점 줄어들고,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예전처럼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충주시 공무원처럼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타고 또 다른 정보를 주는 힘은 새로 생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털이 추천하는 뉴스, 혹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동네의 뉴스보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뉴스가 더 쉽게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세상 전체를 보는 것 같지만
막상 내가 사는 세상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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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필요한 것은 ‘지역성’이 아니라 ‘시선’일지도
그렇다고 다시 종이신문을 찍어내자는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매체가 아니라, 그 매체가 무엇을 보여주는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 전달자’가 아닌 ‘세상 해석자’다.
- “왜 우리 동네에 카페가 이렇게 많아졌을까?”
- “요즘 동네 아파트 단톡방에서 도는 이야기의 정체는 뭘까?”
- “소셜미디어로 지역 정치가 어떻게 바뀌고 있지?”
이런 질문을 묻고,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들.
그들은 예전의 ‘기자’와도 다르고, 인플루언서와도 다르다.
그저 지역을 배경 삼은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포착해 내는 해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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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본다”는 감각의 회복
전통적인 신문의 독자는 정보를 ‘소비’했다.
하지만 지금의 구독자는 정보를 공감하고 확장한다.
댓글을 달고, 스토리에 공유하고, 팔로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정보는 이제 ‘읽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는 것’이 되고 있다.
전 세계가 같은 뉴스를 동시에 읽는 시대지만,
그 정보가 나의 일상, 나의 취향, 나의 가치와 연결되는 순간은 드물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해석은 줄어들었다.
그래서일까.
뉴스레터, 브런치, 로컬 팟캐스트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내 삶의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과 ‘공감의 접점’을 만들어주는 창구가 된다.
예를 들어,
- 지금은 막을 내렸으나, Farm므파탈은 충남 홍성의 농촌 현장을 전하는 팟캐스트로, ‘농사’라는 낯선 일상을 감정과 시선으로 풀어냈다.
- 051FM은 부산 청년들이 만든 팟캐스트로, 인디 음악과 지역 이슈를 다루며 “지역 미디어도 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 H.M.POD는 전남 순천의 청년문화기획단체가 운영하는 팟캐스트로, 비거니즘, 지역 역사, 일상적 주제를 감각적으로 다룬다.
이런 로컬 미디어는 단지 정보를 주는 채널이 아니라, 같은 장면을 함께 바라보는 감각을 회복시킨다.
우리는 다시 ‘로컬’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뉴스보다 나의 삶에 더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의 ‘로컬’은 단순히 지역이라는 경계로만 정의되지는 않는다.
취향과 관심, 필요한 정보의 결이 닿는 곳, 그곳이 곧 나의 로컬이 된다.
서울에 있더라도 부산의 인디 음악을 듣고, 순천의 고양이 이야기에 공감하며, 홍성 농부의 목소리에 끌리는 지금.
우리가 로컬을 ‘함께 본다’는 건, 지도 위의 위치가 아니라 삶의 맥락 위에서 연결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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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의 시대에서, 다층적 시선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감정의 진동 속으로
20세기의 모더니즘(Modernism)은 절대의 시대였다.
모두가 하나의 규범을 따라야 했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단정이 사회를 지배했다.
모던 보이(Modern Boy), 모던 걸(Modern Girl)이라는 이름처럼, 남자는 슈트에 셔츠와 타이를 매고, 여자는 양장 원피스와 모자를 써야만 ‘근대적’이라 여겨지던 시대.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그 틀을 해체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 있고, 시선은 다층적일 수 있으며, 중심이 아닌 틈과 균열에서 의미를 찾는 태도가 가능해졌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추(醜)’ 안에도 ‘미(美)’가 있고, 결함 속에야말로 진정성이 있다는 물음들. 예술, 철학, 패션,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질문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메타모더니즘(Metamodernism)의 문턱에 서 있다고들 한다.
냉소와 열정, 허무와 희망, 해체와 재구성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진지한 아이러니(sincere irony), 혹은 희망하는 체념(hopeful pessimism) 같은 감정이 시대를 규정한다.
절대도 아니고, 상대도 아닌 ‘진동(Moving)하는 시대’.
이 흐름 속에서 정보 역시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정답과 권위, 속도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감정과 연결, 해석과 시선이 더 중요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모두가 아는 이야기’보다, 점점 더 ‘나와 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
정보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점점 더 공감과 연결의 매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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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린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
정보는 이제 단지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슨 이야기를 붙여주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만 보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에서 건져 올렸는지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사실의 양이 아니라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의 방식이다.
어쩌면 정보는,
같은 장면을 함께 바라보는 감각을 회복시키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