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눈물(16화) 시즌 2# 4화
"간난아! 이제부터 어미가 하는 말 명심해라!, 이제부터 넌 동자의 목소리 안 들리는 거다. 알았냐?"
어머니가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 말하자 어머니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없이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온기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끌어안고 정을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평생 끌어안고 살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동자의 목소리를 철저히 숨기며 살았다.
시집 식구 누구에게도 아니 아이들과 남편에게까지 철저히 숨기며 살았다.
처음엔 그런 행동이 낯설었지만 해가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숨기지 않게 된 건 남편이 죽고 함께 생활했던 공간이 그리움으로 가득해져 하루하루 힘들어하자, 미국에 있던 큰아들의 권유로 이사하고 난 후였다.
함께 걷던 공원과 함께 먹던 식탁, 거실, 화장실, 침실까지 모든 공간이 그리움에 절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건드려도 기억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기에 나를 배려한 아들의 선택이었다.
큰아들 귀국 전 서둘러 이사를 해야 했기에 저층을 원하던 내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고 결국 9층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사하던 날 경비실을 지나는데 머릿속에서 '딸랑'하며 동자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아저씨가 머지않아 죽겠다는 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수십 년을 참고 살았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속은 시원했다. 마치 오래된 응어리를 토해내는 것 같은 시원함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경비가 나를 보면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적당히 무시했다.
낯선 공간에 혼자 살려니 조금은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지금껏 나를 지켜준 동자를 본격적으로 모시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불교용품 판매점에서 탱화를 구입해서 걸었지만, 다른 무당들처럼 접신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탱화를 걸어서인지 이곳에 이사 오고 난 후부터 부쩍 동자가 말을 자주 하였다.
머지않아 경비가 죽는다든지 아래층 총각이 나를 찾아올 거라든지 같은 흔치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하루는 이사 온 아파트 주변 상권을 알아보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경비가 새벽에 이삿짐을 나르면 안 된다고 소리치며 시비를 걸어왔다.
그날도 적당히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손주뻘 되는 청년을 본 순간 '딸랑거리며 동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놀아달라고 뛰어다닌다는 말이었다.
젊어 보이는데 아들이 있다는 동자의 말에 놀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나 경비가 사과를 요구하며 도발하는 통에 나도 모르게 "아들놈이 아비 찾아와 놀아달라고 장난질하는 걸 가지고 소란은…. 그것보다 아들놈이 보통은 아니네 몇 놈 죽어 나가야 멈추겠어!" 하며 동자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물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참고 있던 마음을 드러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다음날 새벽동자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는데 이번엔 제법 진지한 내용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이곳에 이사 오고 난 후부터는 아래층 총각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전해 들은 이야기도 범상치 않아 녀석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8층으로 내려갔지만, 선 듯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계단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의 출입문 뒤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지? 동자에게 들었다고 하면 노망 난 할망구 취급당할 텐데….
그러면 어쩌지?' 그런 고민에 쌓여있을 때쯤 803호 문이 열리며 녀석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녀석을 일단 불러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한 걸음 다가서니 녀석이 놀라며 자신을 기다렸냐며 물었다.
녀석이 다음에 오라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을 집어넣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들이 땡중을 찾고 있어 그자를 찾으면 자네가 먼저 죽여야 해 이번엔 아비 노릇 해야지" 하고 말하고 나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예? 저에게 하신 말씀 이세요?"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언제고 찾아와! 오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오겠지만…. 걱정하지 마! 아직 자네 차례는 멀었어."
미안한 마음에 언제고 찾아오라고 했지만, 살짝 겁도 났다.
그렇지만 수년간 경험해 본 결과 이쯤 되면 누구든 다시 나를 찾아왔기에 언젠가 다시 올 것임이 확실했다.
그리고 뒤이어 아직 자네 차례는 멀었다는 말은 동자가 한 말이었다.
어느새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밖으로 녀석이 몸을 날리듯 내렸지만 나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다음날 일찌감치 잠이든 나는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새벽녘에 일어났다.
아직 낯선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있었다면 이불 펄럭거린다고 잔소리 꽤 들었을 행동이지만 이제는 잔소리마저 그리워져 적막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적막한 공간과 사투를 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동자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난 직감적으로 803호 총각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