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눈물(17화) 시즌 2# 5화
녀석이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지? 웃으며 맞을까? 그래도 새벽에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데 마냥 반갑게 맞이하는 건 아니지 않나? 복잡한 생각이 온 사방을 뛰어다녔지만 결국 그놈들 중 어느 한 놈도 잡지 못한 채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잠시나마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녀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흘겨보며 네게 따지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새벽에는 짐 옮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웃끼리 지킬 건 좀 지켜주셔야지요!"
몹시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애송이의 훈계를 들을 만큼 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녀석의 냉기를 밀어내며 조곤조곤 훈계하며 말했다.
"네 아들놈이 그런 거라고 썩을 놈아!"
"뭐요! 장가도 안 간 총각에게 아들이라니요. 이 할머니가 미쳤나!"
잔뜩 성이 난 녀석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버럭 화를 내는 녀석의 모습이 마치 손자의 재롱처럼 느껴져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장롱에 숨겨둔 아들에게 가서 물어봐라."
동자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전했을 뿐인데 녀석의 눈동자가 몹시 불안하게 떨렸다.
더 이상 옥신각신하다간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아 서둘러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조금 전 녀석의 화내는 모습에서 손자 현준이가 투덜대며 화내던 모습이 그려져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오고 난 후 처음 그려보는 미소였다.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 생각나자, 한쪽 벽에 걸어두었던 탱화가 신경에 거슬렸다.
나의 이런 모습을 알 리 없던 가족들이었기에 충격이든 실망이든 하게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다음 주에 장 서방과 소영이가 들린다고 했기에 탱화를 잠시 때어놓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조차도 썩 내키지 않아 며칠 만이라도 걸어두기로 하였다.
어차피 신을 모시기 위해 내림굿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던 나이기에 이까짓 탱화가 차지하는 의미는 심리적 기대 말고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있고 없고의 판단의 주체가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며칠 만이라도 현 상태로 놔두기로 하였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경비가 살해당했다.
무슨 용기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현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땐 이미 1층에 도착한 후였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젊은 사내가 이미 경찰서에 신고하고 있었고 뒤늦게 그 사람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발을 동동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할머니! 어떡해요? 경비아저씨 죽었데요. 흑흑"
"뭐! 아니 어쩌다?"
놀라지 않았지만 놀란 척 되물었는데 그런 내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삶이 나를 이렇게 가증스럽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살해당하셨데요, 남편이 경찰서에 신고했다는데 무서워 죽겠어요."
그녀가 내 오른팔에 매달려 바르르 떨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남편이 다가오며 짧게 목인사를 건네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앞에서 끌어안았다.
"놀랐지? 괜찮아! 경찰 아저씨 이제 올 거야 겁먹지 마! 내가 있잖아!"
사내가 연신 여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지만, 여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틈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동대표와 곁을 따라다니던 젊은 아주머니가 비상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그 모습이 꼴사나워 노려보고 있는데 비상계단 방화문 틈 사이로 803호 총각이 빼꼼히 문을 열었다가 사라졌다.
동자가 사전에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칼부림으로 죽었다는 것과 빼꼼히 문을 열었다 사라진 녀석이 하나의 사건임을 짐작게 했다.
'저녁 석이 범인이구먼' 동자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숨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확신이 들자, 녀석에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녀석의 모습에서 손주의 모습을 떠올렸던 터라 더욱 그랬다.
젊은 부부의 위로하는 모습이 남사스러워 잠시 시선을 돌린 틈에 녀석이 밖으로 나왔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 뒤따라갔지만, 젊은 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다행인 건 녀석이 일부러 그런 건지 나를 기다리기 위해 그런 건지 혹은 잊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목적지를 누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열림 버튼을 누를 때까지 녀석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말없이 9층을 눌렀지만,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녀석의 넋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탱화를 걸던 날 동대표가 내 집을 방문함을 제외하곤 첫 번째 손님이었지만 유쾌하진 않았다.
무당 운운하며 비아냥거리는 어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 생각처럼 따뜻한 위로 따위의 말을 하겠다던 마음가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음이 그리 바뀌자, 나 또한 퉁명스러운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따뜻하게 말하긴 글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인데 몸이 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녀석에 대한 연민이 사라지려 할 때 머릿속에서 동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딸랑~ 칼이 저 형의 피를 맛보면 저 형은 죽어. 그리되면 아들이 어둠에 잡혀 먹인 것이니 칼을 부러뜨리지 않으면 저 형아, 어쩌면 죽을 거야' 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동자의 말을 고스란히 녀석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녀석이 또다시 무당 운운하며 비아냥거리는 통에 울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지만 참았다.
젊은 날의 나였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녀석을 내쫓았을 일인데 인생 막바지의 노인에게는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나에게 복채 운운하며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을 제단에 올려두었을 땐 참지 못하고 녀석을 향해 잔돈을 집어던지며 상욕을 하였다.
"육시랄 놈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냐?"
"그러면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 주시던가요 장가도 안 간 총각에게 아들 운운하시는데 그걸 어떻게 믿고 알아들어요?" 하긴 녀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녀석이 되받아칠 때 녀석의 눈동자가 몹시 불안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때문에 더는 심하게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가 풀린 것도 아니었다.
동자의 말을 조금 더 전해주었지만 믿든 말든 이제는 나 알바 아니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이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동자의 말을 더는 전해주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저 녀석의 살인에 동조하는 공범 취급이라도 당하는 날이면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가족들 생각이 먼저 밀려와 동자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문제는 그때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해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온몸에 한기가 돌고 기운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심한 몸살감기와 비슷해 견뎌보려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