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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선 Jun 23. 2024

수직홍채 6

12 간지

한순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을 믿고 함께했던 동료가 한순간 사라졌기 때문에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 동료들의 생사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좀처럼 뛰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잠을 잘 수 없었다.

폐허가된 아지트는 다른 차원으로 바꾸면 되겠지만 놀란 가슴은 공간을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잠을 자야 했다.

그것이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와 함께 한기가 느껴졌다.

꿈을 꾸고 있었지만, 꿈속에서조차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사방을 둘러보던 김창수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 맞아?" 꿈속에서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잠들기 전 시간이 분명 점심시간쯤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시간을 반영하는 이상 낮이어야 했고 설령 꿈이 아니라고 해도 무언가 보였어야 했다.

처음엔 넓디넓은 순백의 사막 한가운데 자신만 보이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밝았던 빛이 하나둘 어둠에게 잡아먹히는 듯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러다 결국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그는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마치 거목처럼 서서 저편 어딘가를 향해 왜 쳤다.

"이봐! 거기 누가 있는가?" 잔뜩 겁에 질린 창수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왜 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이 짖은 어둠에 묻혀 멀리 가지 못하고 귓전을 맴돌다 발아래로 떨어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야!" 자신을 '구'라고 부르는 건 오래전 이름도 묻기 전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었던 사내가 유일했기에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예요! 살아계셨네요!" 반가움에 눈시울을 붉히며 사내를 불러보았지만 목소리만 들렸을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잊었구나! 내가 사라지기 전 너에게 남겼던 마지막 말을 말이다." 어둠 속에서 사내가 말했다.

"마지막 말?" 잠시 머뭇거리던 김창수가 '아~'하며 탄식했다.

낮이 어둠에 잡아먹히거든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는 그의 당부가 뒤늦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김창수가 물었다.

"그새 또 잊었느냐! 앞만 보고 걸어야 한대도"

"앞으로 걸어가면 동지들을 만날 수 있나요?"

"그런 건 아니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니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리고 이제 그들은 보내줘야지 더는 함께 할 수 없다." 사내가 답했다.

"그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죽었나요?" 김창수가 어둠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갔을 뿐 죽지는 않았다. 아마 잊지 못할 고약한 꿈을 꿨다고 생각하거나 함께했던 짧은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 허나 그조차도 짐작일 뿐 확실하진 않다 결국 기억을 붙들고 살든 잊어버리든 본인 의지에 따라 달라질 테니 말이다." 

"휴~ 다행이다. 죽은 줄 알았거든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쩌긴 다시 친구들을 모아야지" 

"기준이 없으니, 누구를 데리고 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준은 너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너만의 기준을 만들어 보거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김창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낮이 어둠에 잡아먹히면 앞만 보고 걸으라고 하셨잖아요. 이유가 있나요?"

"이곳의 한 걸음은 시공간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결정했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야지 주저하거나 망설이다 자칫 원치 않은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동지들을 만나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났지만 잠들기 전 바둥거리던 심장은 어느새 곤히 잠든 아기 숨결처럼 평온해졌다.

몸을 일으켜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든 창수가 빼곡히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가며 읽고 또 읽었다.

쥐 (자鼠), 소 (축牛), 호랑이 (인寅), 토끼 (묘卯), 용 (진辰), 뱀 (사巳), 말 (오午), 양 (미未), 원숭이 (신申), 닭 (유酉), 개 (술戌), 돼지 (해亥) 세로 열로 12 간지 동물들의 이름과 그 옆으로 사람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수첩 속에는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이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그가 남긴 수첩 속 인물들의 이름을 읽어 보았지만, 김창수는 결국 이번에도 찾아내지 못했다.

내국인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인물들이 더러 보였기에 추측할 수 있었겠지만, 외국인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김창수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의 문을 만들곤 그곳으로 빠르게 몸을 밀어 넣었다.




정독 도서관 분수대 앞이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작은 일렁임이 생겼고 그곳에서 김창수가 걸어 나왔다.

그는 그 길로, 자료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수첩 속 인물들에 찾아보았다.

이탈리아 복서 프리모 카르네라부터 링컨 대통령을 경호했던 앨런 핑커튼 그리고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에 이르기까지 국적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첩 속 인물들을 알아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사망자가 속출했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새벽의 어둠이 가시기 전 김창수의 안주머니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김창수가 서둘러 테슬라가 만들어 주었던 감지기를 꺼내 들자 15시 방향에 붉은 점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뭐야! 도서관 쪽인데…." 김창수가 혼잣말로 말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운 거리였지만 도로에는 이미 아침을 시작한 자동차들이 하나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김창수가 가로수 나무 오른쪽에 일렁이는 파장을 만들곤 그곳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손에 들고 있던 탐지기를 들어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한 후 파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도서관 인근의 작은 공원 벤치가 일렁이더니 그곳에서 김창수가 걸어 나왔다.

그는 나오자마자 탐지기를 다시 들어 정확한 위치를 제차 확인한 후 주변을 살폈다.

그가 일렁임 속에서 걸어 나올 때 그의 뒤편에 있던 벤치에 검은색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모습이 김창수의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 뭐지?" 김창수가 오른쪽 눈썹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김창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나직이 말했다.

"죽었군. 이번엔 누구신가?" 벤치에 앉아 축 늘어져 죽어있는 사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김창수가 그의 머리를 들어 그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자는…. 이종석 의원!"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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