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 (relationship)

# 코스母스 12화

by 서기선

# 인연 (relationship)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한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저 사람들은 나와 어떤 관계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 그러면 N과 나와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란 말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지 제가 뭐길래 이토록 미워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N과의 관계는 분명한데 나와 N과의 관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러면 나는 왜 N을 이토록 미워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나는 N과 인연이라는 것으로 묶기가 싫어 격렬히 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N을 확인한 순간 일그러진 나의 미간이 먼저 달려가 싸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때론 일그러진 미간은 많은 것을 대신해 준다.

이를테면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나를 향해 [왜! 가려고?] 하시는 아버지에겐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짜장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 하며 대신 항변 해주기도 하고 바라보던 N에게는 “너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라며 경고를 날려 주기도 했다.

가계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춘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혼잣말로 [에이 엄마만 불쌍하지] 하며 혼잣말치 고는 제법 큰 목소리로 이야기한 후 가계 문을 나왔다.

당시 나에게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진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미간에 주름을 만들거나 건들대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지하철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정말 N을 선택하신 건가?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인연이라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지금 아버지의 선택이 N이라면 그리 생각하셨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다만 당사자 주변인이 받아들일 것인가 밀어낼 것인가 하는 선택만 남았을 뿐이고 나는 밀어내는 쪽을 선택하였기에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고 그걸 막을 권한이 아버지에게 없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 공중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공중전화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됐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다.

우리 집은 무선전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어디를 가더라도 전화벨이 울리면 받을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서러운 신호음만 들릴 뿐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다.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시간에 집에 없을 분이 아닌데... 어딜 가신 거지? 동생이라도 받았어야 했지만 아무도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오후 일정이 떠올라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서둘러 역삼동까지 가야 했다.

총신대에서 가는 것보다 사당에서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갈아타지 않고 사당에서 2호선을 바로 타면 불과 다섯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총신대 입구 쪽으로 가고 있었기에 사당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나 총신대에서 사당까지 이동 후 2호선으로 갈아타는 시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사당으로 가서 지하철 2호선을 타야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었는데, 너무나도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

그날 저녁 친구들이 찾아왔다. 물론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다.

나는 고모 집에서 사촌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사촌은 엄밀히 따지면 나보다 1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내가 학교를 늦게 들어간 대신 이 녀석은 남들보다 1살 빨리 학교를 들어갔고 그 덕에 이 녀석이 나보다 1학년 선배였다.

하루는 사촌이 협상을 청했는데 자신이 나보다 1살 어리지만 1학년 선배이니 비겼다며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는 것이었다.

당돌했지만 굳이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형 대접해라" 하기에도 애매해서 녀석의 협상을 받아주었고 그때부터 녀석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녀석의 친구는 나와 동갑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것은 사촌이 1살 빨리 들어간 탓에 사촌의 학교친구가 모두 나와는 동갑이 되므로 거리감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친구들 몇이 고모 집으로 찾아왔다.

사촌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술 약속이 있으면 언제나 나와 함께 참석했다.

반면 나는 술을 너무 잘 마신다. 아직 취해서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은 사촌이 자신과 동석하여 달라고 부탁했고 그렇지 않아도 낮에 있었던 만남 때문에 심기가 불현 했던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건국대학교 입구 호프집에서 시작해 성신여자대학교를 지나 혜화동까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3차까지 이어졌던 술자리는 고등학교에서 밴드부로 활동했다던 성훈이 녀석의 주사와 구토로 끝이 났다.

[어이 친구 많이 취했네 일어나 가자] [우 왝] [아이고 이화 상아~ 그러길래 왜 대작을 하나~ 괜찮아?] [우 왝] [얘들아! 상훈이 좀 일으켜봐 얼른 택시 태워 보내자 안 되겠다.]

그때 사촌이 쓰러져있는 성훈이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냥 내 차에 태워 난 술 마지기 않았어. 그리고 이런 꼴로 택시를 타면 세탁비까지 내라고 할걸]

사촌이 만들어준 술자리를 하게 되면 마치 술 상무가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술잔에 술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슬그머니 술잔을 밀어낸다. 그러면 마치 본래 술잔의 주인이 나인 양 태연하게 술잔을 비우고 그걸 다시 본 레의 위치로 보내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것과 녀석의 것을 함께 마셨으니 남들보다 족히 2배는 마시는 셈이니 취할 수 박에 아무리 술을 많이 먹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누적량이 많아지게 마련인데 다행인 건 친구들 모두가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라 총량으로 따지면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정신 차리고 버틸만했다.

하지만 성훈이의 그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뱃속부터 끌어 오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안돼 참아야 해” 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친구들이 성훈이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순간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다.

호흡을 깁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뱃속을 안정시켰다.

고개를 틀어 친구들을 보았을 때 성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뒤로 물러나 쉼을 하는 동안 사촌이 자신의 차에 태운 모양이었다.

내가 이리저리 사촌의 차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뒤쪽에서 경적이 울리며 사촌이 손짓하였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괜찮으냐?] [내가 뭘] [아까 보니까 취한 것 같던데!] [취했다기보다는 저 녀석이 구토하니까 나도 모르게 울렁거려서 잠시 바람 좀 마셨지] [너무 무리하지 마라. 뭐 좋은 거라고 그리 마시냐?]

[지랄하네 지가 줬으면서...] [마시기 싫으면 안 마시면 되지 준다고 다 마시냐!] [미친놈 마실만하니까 마시지 운전이나 해] [미친 세끼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달리는 차 창 너머로 불빛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지하철 유리창에 비쳤던 오전의 그것들을 생각해 냈다.

그리곤 다시 N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우울해졌다.

[에이 씨발 기분 더럽네] 운전하던 사촌이 놀라며 [뭐 나한테 그런 거냐?] [아냐 그런 일이 있었어.] [뭔데? 오늘 삼촌에게 간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갔다 왔지. 그리고 거기에서 N도 만났지] [뭐! 와 씨발 대박이다.] [그래서 기분 더럽다고] [뭐라는데? 뭐라고 하시는데 삼촌은?] [몰라 그냥 나와버렸어.] [와 ~ 씨발 그년도 대단하다.] [.......] [숙모는? 숙모는 알고 있니?] [모르겠어. 아시는지 모르는지] [와~ 삼촌 그렇게 안 봤는데... 야 그러지 말고 한잔 더 할래?] [미친놈 술도 못 마시는 놈이] [아 씨발 그런 얘기를 듣고 어떻게 안 마셔] [지랄하지 마! 맥주 반 캔도 못 마시면서...]

[그러면 네가 또 마셔주면 되잖아 으하하!] [아이 미친 세끼 하하하]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맥주 2캔을 들고 들어왔고 처음으로 녀석과 술을 마셨는데 호기롭게 맥주켄을 열어 건배를 하자던 녀석이 맥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네 쓰러졌다.

[에라 미친놈 술 한잔 하자더니...] 어느새 쓰러져 잠들어있는 녀석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건배는 얼어 죽을... 건배란 마를 건 에다가 잔 배 자를 써서 잔이 마른다는 것인데... 그 정도면 음복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이미 쓰러져 잠든 녀석을 보다가 남아있던 맥주를 서둘러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또다시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결국 그런 잡생각들 때문에 결국엔 밤새워 괴로워해야 하고 그것은 아침에 있을 PPT에 악역 양을 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필사적으로 잠이 들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정확히 몇 시쯤 잠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매번 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했던 나는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7시 30분에 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촌을 뒤로한 채 서둘러 출근을 했고 그날 저녁 이틀의 휴가신청을 했다.

금요일과 월요일 각 하루씩 휴가신청을 하였고, 금요일부터 4일간의 긴 휴가를 갈 수 있었다.

사실 아버지에게 다녀오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려고 했지만 받지 않으셨고, 그런 이유보다 어떻게든 사실을 알려야 했지만, 전화상으로 N이 아버지 가계에서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알려 드렸다간 어머님께서 받게 될 충격 그리고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기에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면 어쩌면 총신대 지하철에서 어머니와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퇴근 후 심야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새벽 4시에 도착이니 이동 중에 미리 잠을 자 둬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해 봤지만 어떤 것도 어머니 같지 않은 상상만 떠올랐다.

신기한 건 그런 생각들을 잠시 했을 뿐 그리 오랜 시간 생각하진 않았다.

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곯아떨어졌고 눈을 떴을 땐 이미 통리역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황지 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내리실 분은 잊으신 물건 없이 열차가 정차한 후 하차해 주시기 바라며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새벽의 황지역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어둠조차 잠들어있는 듯했다.

선로에서 대기실까지 거리가 어찌나 짧은지 뛰어가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다.

마치 고전영화에 간혹 등장하는 간이역 같은 느낌도 들었고, 이곳에 살 때는 몰랐던 감성이었다.

대합실을 빠져나와 인근에 주차 중인 택시를 잡아타고 계산동으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려면 2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새벽에 연락도 없이 집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집으로 들어서는 나를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계셨는지 마중 나오셨다.

[엄마 나 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어?] [설마 아들 오는데 엄마가 모를 줄 알고? 하하하 아냐 사실 고모가 알려줬어. 밥은?] [먹었어요] [그래! 그럼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어] [예] 어머니를 보는 순간 그간의 잡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너무나도 편안한 잠자리가 되었고 그날 9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9시면 평소보다 1시간 30분이나 늦은 시간이었고 내가 그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던 건 고등학교를 끝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 11화return to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