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열아홉
한의원에서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해가 막 떠오르던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며 공항으로 향했다. 공복으로 떠난 여행의 시작부터 전혀 의도치 않은 단식 여행이 되어버렸다. 부푼 기대를 안고 먼 길을 달려온 첫날, 새벽 6시에 집을 떠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밤 8시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하였다. 수줍어서 식당에 혼자 들어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떠나온 첫 여행에서는 왜 그렇게 부끄러운 일 투성이었는지, 기다림과 외로움의 연속에 지쳐버린 여행의 첫날.
그렇게 14시간 공복 상태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이후에도 도저히 밖으로 걸어 나갈 힘이 없었다. 하루 종일 험상궂고 쌀쌀맞았던 날씨와 다르게 숙소가 얼마나 포근하던지, 자연스레 떠나온 집 생각이 나기 시작하며 눈물이 맺히고 괜히 또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야심 찬 다짐으로 시작해 제주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짤막하게 적은 내 일기장에는 ‘혼자면 혼자 인대로, 여럿이면 여럿 인대로, 생각을 고정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이 되자.’ 라며 의지를 다졌지만 외로움이 휘몰아치니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열여덟 한 해를 한의원에서 보내는 동안 일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흉내 내다보니 본 나이의 연약한 모습을 잠시 잊고 있었었다. 여행 중 마주한 앳되고 나약한 모습에 나 스스로의 깜짝 놀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혼자 들썩들썩 궁상을 떨던 도중 도미토리를 함께 쓰는 언니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인사를 건네었다. 처음 보는 언니인데도 불구하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힌 채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언니는 당황하지 않으시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라며 같이 나가자며 옷가지를 챙겨주며 두런두런 대화를 이끌어주셨다.
쓸어갈 듯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길을 뚫고 게스트하우스 건너편 마을에 숨어있는 톰톰카레집에 도착하여 14시간 만에 먹었던 첫끼, 반반카레는 내 생에 손꼽히는 한 끼의 식사였다.
여행의 중반,
가시리의 타시텔레에서 안락한 잠자리와 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고 서귀포의 도심으로 나왔다. 이전에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와는 달리 대규모의 호스텔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전 느낌들과는 사뭇 달라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주위를 서성이고 맴돌다 용기를 잃고 점심과 저녁을 쫄쫄 굶게 되었다. 그날따라 배정받은 2층 침대가 어찌나 흔들리던지, 허기와 함께 나의 정신 줄마저 느슨해져버리고 말았는데...
파티를 한다던 객실 문밖으로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배는 무지하게 고픈데 밖이 깜깜해지자 나가지도 못하고 허기진 뱃가죽을 겨우 붙잡고만 있었다. 괜히 풀이 죽은 나는 콘센트 옆에 바짝 붙어 충전기를 꽂아둔 핸드폰만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던 순간 충전기의 선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넘어지며 충전기가 꽂혀있던 멀티탭의 뚜껑도 함께 날아가 버린 것이다. 관계자분께 말씀드리면 그만인데, 게스트하우스의 기물을 파손했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고작 멀티탭이었지만, 변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복구를 시켜놓으려 전기가 흐르는 멀티탭을 이리저리 누르고 만지다가 그만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건물이 통째로 정전되어 버렸다. 약 30초 정도 전기가 나갔는데, 그 30초 사이에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오가며 분명 나를 잡으러 올 것이라는 생각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다행히도 건물의 예비 전력으로 인한 것인지 재빠르게 복구가 되었지만, 큰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프런트에 나가 저 때문에 방금 전기가 나간 것 같다고 울상으로 얘기를 하자 사장님은 도리어 나에게 다친 곳은 없냐며 괜찮다고 다독여 주셨다. 입술을 꽉 깨물고 몇 번이나 죄송하다 고개를 숙인 뒤 침대에 돌아와 엉엉 울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자 도망가듯 짐을 싸고 퇴실을 하였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배낭을 메고 하염없이 걸어 다니다 새로 묵을 숙소를 찾아 애월로 향했다.
호스텔처럼 규모가 큰 숙소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 소규모의 숙소를 찾았다. 젊은 언니, 오빠들이 호스트로 있는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도미토리 객실로 안내받아 들어갔는데, 그 전날 타시텔레에서 함께 묵은 언니가 침대에 앉아계시는 것이었다. 타시텔레에서 그다지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어찌나 반가운지 나는 그대로 언니에게 달려가 하룻밤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그날 저녁, 언니와 함께 먼 길을 걸어가 갈치조림을 먹고, 숙소에서 머무는 여행객들과 함께 도란도란 밤을 보내었다.
나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정전 사건 이후, 나는 소규모의 게스트하우스만을 찾아다니며 여러 여행객을 만나고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에 푹 빠져 돌아왔다. 여행을 마치고 온 나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의 스텝을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행 도중에 합류해 비슷한 감정을 느낀 부모님도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에 호기심을 느끼셨다. 그 후 나는 스텝을 지원하는 네이버 카페에 가입을 하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새 글을 확인하며 적절한 로망과 조건에 충족하는 게스트하우스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던 도중, 엄마와 아빠가 툭 던지시듯 말씀을 하셨다. “그냥 네가 한번 해봐. 우리가 차리지 뭐.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무언의 자신감이 있던 나는 재빠르게 제안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평소 ‘무계획이 계획이다’ 하며 무작정 들이대던 가족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단단히 한몫을 한 일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차리는 자본은 부모님께서 나의 대학교 학비와 그동안 받지 않은 사교육비를 한꺼번에 투자해주셨다. 한참 모자란 돈이지만 그동안 일을 해 모은 내 전 재산 1,200만 원 또한 모두 털어 넣었다.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호기심을 느꼈을지라도 나는 아마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조금 더 계획적이거나 구체적인 실행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리 재고 저리 재다 걱정이 늘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다 가벼운 시도조차 어려워질 때가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 나이의 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뛰어들어 공간을 오픈하고 운영하기까지 많은 위기에 놓였지만, 그 당시에 게스트하우스를 꿈꾸고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열아홉 살의 무식한 용기로 덤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동안 일어날 수많은 위기를 예측하고 있었다면 나는 과연 시작할 수 있었을까? 간혹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는 속담과 같이 가끔은 새로운 시작에 거침없는 무모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새로운 시도에 앞서는 너무 많은 생각과 과분한 고민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그 마음, 온전히 절실한 마음 하나로 시작된 내 첫 사업 ‘열아홉 살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성장하는” 비빔 게스트하우스’의 탄생 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