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열아홉
공간은 전라북도 전주에 자리 잡았다.
전주 한옥마을을 길 하나 두고 건너갈 수 있는 가정집의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였다. 2014년도, 그 해 전주에는 한옥마을 관광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급격하게 불어나는 관광객 수에 한옥마을의 숙박 공간은 턱 없이 부족하여 조용하던 전주의 외곽까지 성업을 이뤘다. 여전히 대한민국 관광 상위권에 랭킹 한 전주 한옥마을의 시작이 2014년 그해 무렵이었으니 게스트하우스가 운영될 수 있는 관광 조건과 관광객의 수요, 위치는 무척 탁월했다. 또한 전주와 인근 전북 지역의 생활권을 둔 나로서는 낯설지 않고 익숙한 지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환경 또한 완벽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번 해보자’ 하고 마음을 먹은 바로 다음 날 전주로 터를 보러 나왔다. 부동산을 돌아보며 한옥마을 인근에 있는 동네를 찾아 빈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여러 집을 보러 다니던 중 어느 한 집에서 아빠가 낯설지 않은 묘한 느낌을 받으시고는 구조를 천천히 살펴보니 아빠가 학창 시절에 살던 집이었던 것이다. 우연한 만남에 아빠는 무척 반가워하셨던 에피소드도 있다. ^^
부동산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선택한 특정 동네의 빈집들을 살펴보았는데, 부동산 사장님께서 우리가 지목한 동네 외에 한 곳을 더 소개해주셨다. 생각지도 못하였지만, 위치적인 요소로는 제일 훌륭한 곳이었다. 다만, 불규칙적으로 골동품을 수집했던 주인아저씨의 취미 활동에 몹시나 너저분한 집 컨디션에 첫인상이 그다지 좋진 못하였다. 게다가 이미 1970년대에 지어진 양옥집에 크게 손보지 않고 혼자 사시던 곳이라서 관리마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위치적인 요소와 아담한 규모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고, 자칭 문서 복을 가졌다는 엄마의 긍정적인 의견으로 리모델링을 결정지으며 낙점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동산 사장님께서 좋은 터와 리모델링을 위한 목수님도 소개를 해주셨고, 이사 오게 될 게스트하우스의 이웃분들도 모두 반겨주셨다.
한 달간의 리모델링을 예상하고 성수기인 7월 오픈을 계획하며 공사를 시작하였다.
40년 동안 큰 공사 없이 유지되었던 집이라 굵직굵직한 골조와 벽을 남기고 전부 헐어냈다. 게스트하우스 숙박 특성상 많은 이들에게 눈에 띌 수 있도록 외부의 담벼락도 헐어내었다.
그렇게 공사가 50% 정도 진행이 되었을 무렵이었나.
특별할 것 없던 어느 아침, 평소와 같이 시골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공사가 진행될 때에는 저 멀리 골목 초입부터 공구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그날따라 골목에 적막이 흐르고 쥐 죽은 듯 고요했는데 현장에 도착하니 사람은 커녕 사방에 널려있던 공구 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실 조짐은 있었다.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게스트하우스 공사의 허점이 눈에 띄기 시작하며 진행 속도는 더뎌졌고, 날이 갈수록 공사장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많아지더니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공사를 처음으로 맡기고 계약 당사자인 A목수가 B목수에게 하청을 주고, 하청을 맡긴 B목수가 또 C소장에게 하청을 줘 관계가 얽히고설킨 것이다. 일을 맡긴 3명의 사람들도 불통으로 인하여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결국 오해가 쌓이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중간에서 끼여 정확한 사건 개요를 알지 못했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공사를 중단시키고 떠나간 자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B목수, C소장이 공사현장을 접고 철수하자 계약 당사자인 A목수는 그제야 현장에 나타났고, B목수가 게스트하우스 공사현장 대금을 횡령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건 추후의 일인데, 게스트하우스가 오픈되고 난 후 B목수는 나를 상대로 인건비 미지급으로 고소를 하였다. B목수는 A목수와의 계약관계였음에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문제는 아니었으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남아있었다. 다행히 큰 소란 없이 지나갔지만, 당시에는 내 이름으로 날아온 고소장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계약 당사자인 A목수가 현장으로 와 나머지 일을 도맡으셨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아니 그 누가 봐도 너무 허접하고 엉성할 정도의 일이 지속되었다. 실내의 마감 부분들을 목작업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어설프고 성의 없게 일을 하였다. 결국 우리 가족들은 참지 못하고 이를 따지며 싸우다 A목수까지 공사장을 떴다. 계약된 공사대금으로 약속한 것들은 50%도 이행되지 못했다.
A목수까지 떠난 게스트하우스는 엉망인 된 상태로 모든 게 중단되었다. 단열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단독주택에 모든 창은 단창에, 바닥 타일의 시공은 엉성하여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일 대부분이 떠버렸다. 방 내부의 천장 몰딩은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허접하여 모조리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방문이라고 달아놓은 것은 수평도 맞지 않게 달아놔 모든 문이 내려앉아 전부 떼어내야 했다. 장마 전에 미리 해둬야 했던 옥상 방수는 결국 비를 한바탕 적시고서야 할 수 있었다. 벽지 도배마저 장마 후 충분한 건조가 이뤄지고 작업해야 했는데, 시간이 없다며 촉박하게 하는 바람에 얼마 되지 않아 곰팡이가 올라왔다. 창문 하나 없는 화장실에 환풍기도, 외부에 놓인 보일러 조정실에 문도 그들이 떠나기 전 겨우겨우 달아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로 모든 공사 결과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려든 무모함이 초래한 당연한 결과였다. 무모함이 용기가 되어 시작할 수 있었지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부 과정에 있어서 전부 탄로 나고 말았던 것이다. A목수와 크게 한 판하고 모든 목수가 떠나고 나서, 가족들마저 서로에게 잘잘못을 따지며 분열이 일어났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지급하여 남은 것은 엉망이 된 현장과 지쳐버린 몸과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싸웠어도 가족이어서 그들처럼 갈라설 수도 없는 노릇. 배가 고파 김치찜을 먹으러 갔다. 앞으로 우리 어떻게 하냐며 다들 머리를 싸매고 김치찜을 먹었다. 공사는 한 달째 진행되고 있었지만 지체되고, 철거하고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수도 없어 여전히 기술력이 필요로 했다. 새로운 리모델링 전문업체를 고용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지출이 있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때 우리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만능 맥가이버 고모부. (평소에 거주하시는 단독주택을 뚝딱뚝딱 고치시며 살아가시던 고모부) 생각난 김에 바로 고모부께 전화를 드렸는데, 마침 고모부께서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셔서 일을 도와주시겠다고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구세주의 등장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투수 고모부가 오시게 되면서, 가족 용역단을 꾸려 공사 현장으로 발 벗고 뛰어들었다. 가족들은 작은 옥탑방에 단열재로 사용했던 은박지를 깔고 자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A목수가 떠나기 하루 전, 보일러 테스트를 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쓸 방에는 열기가 올라오질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내 방에는 보일러 관이 깔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급히 보일러 관을 깔았는데 미장은 하지 못하고 그들이 떠났었다. 결국 내 방의 미장은 아빠가 직접 하셨다. 기술 없는 일반인이 처음 한 것치곤 꽤나 괜찮았지만, 나의 방은 그때의 생생한 기억을 잊지 말라는 흔적인 듯 여전히 울퉁불퉁하다.
현관문과 거실을 잇는 작은 돌계단이 있었는데, A목수는 차갑고 삭막한 그 돌계단을 그대로 사용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겠다고 해 그곳에는 내가 직접 타일을 붙였다. 난생처음 타일을 만져보고 붙여본 내가 멋대로 타일을 붙이니 금방 떨어져 나가고, 밟으면 떼어져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느라 그 좁은 구역에 타일을 붙이는 데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결국 하루 종일 매달려서 타일을 붙인 결과, 처음 해본 것치곤 이 시공자가 대체 누구였는지 캐묻지 않아도 될 만큼 평범한 시공을 해냈다.
그 외에도 실외의 외장재부터 실내까지 모든 벽에 페인트칠, 스테인, 니스칠을 하고, 장판을 놓고, 데코타일 일부를 떼 다시 붙이고, 객실에 쓸 침대와 가구를 짜고, 또 그것들을 꾸미고, 방 인테리어를 하고, 미장하고, 펜스를 세우고 마당을 꾸미며 외부 벤치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약 2달간 가족 용역단이 나서서 게스트하우스 곳곳을 아마추어 솜씨로 완성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게스트하우스에는 가족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가족들의 개성을 담아 독특한 색을 입힌 게스트하우스가 탄생하였다. 약 한 달을 예상하여 7월 오픈 예정이었던 일정은 총 4달간의 공사로 지체되었지만 2014년 10월 3일, 마침내 게스트하우스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과연 이 집이 게스트하우스로 오픈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마저 판을 칠 때, 눈앞의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차근차근 극복하다 보니 어느새 멋진 집이 탄생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