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열여덟
2013년, 시골의 한 한의원에 갑작스럽게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한의원을 다니시던 고모께서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으로 서울에 올라가셔야 하는 바람에 나에게 2주 동안 일을 다녀줄 것을 부탁하셨다. 급하게 사람을 구하기가 힘든 시골 지역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고모의 빈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역시나 첫 출근부터 결코 만만치 않았다. 손님으로 찾아온 할머니들께서는 딱 봐도 앳돼 보이는 내가 유니폼과 가운을 입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어디서 이런 젊디 젊은 아가씨가 튀어나왔는지에 대해 추리를 하셨다. 나의 작은 말과 행동이 모두에게 시선 집중되었다. 도대체 몇 개의 눈이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셀 수 없었다.
그렇게 끙끙 앓는 걱정을 하며 첫 출근을 하였던 한의원에서는 약속했던 2주를 훌쩍 넘기고 장장 1년이 넘도록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아르바이트였지만, 고모가 쉽게 내려올 수 없게 되자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취업동의서 등 정식 채용 서류를 거쳐 사대보험 신고가 된 직장인의 신분이 되었다. 며칠 후, 직장인 자격으로 발급된 실물 건강보험증까지 수령하게 되었는데, 반년 동안은 매일 아침 나서는 출퇴근길에 보물인양 가방에 꼭 챙겨다니기도 했다.
나의 하루는 보통 이러했다.
아침 7시 50분에 나와 시골을 오가는 군내 버스를 타고, 할머니들의 짐을 나르는 버스 짐꾼을 자처하며 한의원으로 향한다. 버스 기사 아저씨들께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는 나를 알아봐 주시곤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아주신다. 4, 9일마다 서는 장날에는 만원을 이루는 버스 안에서 평소보다 음악의 볼륨을 높인다. 쿵짝쿵짝 거리는 뽕짝 음악 속에서 서로의 건강과 올해 고추 농사에 병이 잦아 새로운 전염병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이에서 홀로 에이핑크의 노노노를 입 모양으로 열창하며 출퇴근을 한다.
보통 오전 진료 시간에 손님이 많았다. 특히 4, 9일의 장날은 한의원의 자리가 모자라 내가 앉던 의자마저 내어드린다. 왜 내 차례는 오지 않는 거냐고 접수해 놓은 것이 확실하냐며 따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달달한 커피나 율무차를 뽑아드리며 “쪼~끔만 더 기다려주세요잉” 하고 말씀드리면 피식 웃으시면서 제 차례를 기다려주셨다. 대체로 한가했던 오후 시간에는 쉬기보단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작은 한의원을 뺑뺑 돌곤 했다. 대부분 나는 음료 자판기의 파우더를 채우거나, 소화제를 배분하거나, 파스를 채워두거나, 한의원의 마사지 기계에 다리를 넣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타 병원보다는 조금 더 길었던 한의원의 점심시간. 밥을 후다닥 먹어 치우고. 이어폰을 챙겨 읍내 한 바퀴를 산책했다. 시골장이 열린 날이면 어묵과 핫도그, 도넛을 사 먹고, 살 것도 없지만 괜히 시장 한 바퀴를 돌며 단골손님이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 헤맨다. 때마침 물건을 팔러 나오신 단골손님 할머니를 뵙게 되면 “안녕하세요~ 저 OO한의원이에요!”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1년이 넘게 한의원에서 일하는 동안 함께 일하시던 간호조무사분이 3번이나 바뀌었다. 3번이나 바뀔 무렵에도 나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들리시는 할머니들께서는 “이 아가씨 아직도 여기 있네.” 하고 나를 기억하여 먼저 반겨주시기도 했다. 한의원이 위치해 있는 곳은 작은 군 단위의 시골이라 대부분의 손님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그들에게 베인 시골 냄새는 구수하고, 말투는 무척 정겨우셨다. 단골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파마나 이발로 헤어스타일에 변화가 생기셨을 때, 새로운 액세서리를 하나씩 착용하신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이발 하시니 훨씬 어려 보이세요!”, “엥? 오늘 모자 예쁜 거 쓰고 오셨네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곱디고우신 할머니들께서는 소녀같이 수줍어하시고, 터프하신 할아버지들께서는 좋으시면서 괜히 한 소리 하신다.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느라 몸이 성한 곳이 없으셨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을 시작하셔서 오후가 되면 일을 마치시고 한의원을 시작해 내과, 안과 등 모든 병원을 내원하셨다.
특히나 농사 일을 하시다보니 허리와 어깨, 다리가 주로 치료 받는 부위였다. 한의원에서는 치료 후 처방과 함께 서비스 차원으로 파스 한 장씩을 드리곤 했는데 허리나 어깨 쪽은 혼자 붙이기 힘들어하시기에 치료하신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여쭈어보고 다독다독 파스를 붙여드렸다. 그리고는 내가 좋아하는 단골손님들께는 파스 한 장씩 꼼쳐드렸다. 꼭 내 것인 듯 양 생색을 텅텅 내면서 말이다. ^^
별명이 아가씨 간호사 혹은 짝은 간호사로 불리며 만인의 손녀가 된 나의 퇴근길에는 항상 선물 보따리가 손에 들려있었다. 튀밥 집을 운영하시는 할머니께서는 튀밥 종합 세트를 선물해주시기도 했고, 집에서 농사지은 땅콩, 고추, 상추, 배추 등을 집에서부터 바리바리 챙겨 나오셔서 가족들과 나눠 먹으라며 푸짐하게 챙겨주셨다. 사탕을 항상 챙겨 다니시는 할머니들께서는 주머니에 달달한 사탕과 젤리를 꼭 넣어주고 가셨다. 치료를 끝내시고 유유히 떠나시던 몇몇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다시 돌아와 호탕하게 간식거리 하라며 떡이나 요구르트, 음료수를 쥐어주셨다.
한의원에서 1년이 넘도록 일을 하며 한 달에 약 110만 원이 되는 월급을 받게 되었다. 열여덟에 처음 만져보는 백만 원은 손꼽히는 억만장자 만수르가 된 것만 같은 부유함을 느꼈다. 마침 한의원 맞은편에 위치한 농협을 수시로 오가며 5개가 넘는 통장을 만들고 첫 체크카드를 발급받아 월급 관리를 시작하였다. 적금통장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18살 아이는 미래 자금 통장, 여행 자금 통장, 비상금 통장 등 마구잡이로 통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모든 통장에 거창한 이름을 붙이며 개설한 지 3일밖에 안 된 적금통장을 어쩔 수 없이 해지하러 갈 때는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렇게 월급을 받기 시작하며 열여덟에 금전적인 독립을 이루며 천이백만 원이 되는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한의원에 머물고 본격적인 게스트하우스 준비로 일을 그만두었다. 그만둔 그해에는 한의원을 가끔 들리곤 하여 원장님의 안부를 묻고, 단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소식을 여쭈었다. 그중 몇 분의 비보를 접할 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일하는 동안에도 여러 비보를 접할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었다. 매주 2-3회씩 내원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오시지 않아 같은 동네에 사시는 아주머니께 안부를 물었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날은 하루 종일 꾹 참다 손님이 없던 틈을 타 한의원의 뒷문으로 나갔다. 소리가 새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후에야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파묻고 숨죽여 울 수 있었다. 그저 펑펑 울고 마음 아파하다 하루에 몇 번이고 명복을 빌며 유독 아파하셨던 오른쪽 다리에 고통이 멈추셨기를 기도했다.
오전 8시 30분, 한의원의 셔터를 올리며 문 앞에 앉아계시던 부지런한 할머니들께 왜 이렇게 늦게 문을 여냐며 꾸짖음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문을 닫고 나오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배우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해나가며 한의원의 손님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미묘한 여러 감정을 느끼며 쑥쑥 커갔다. 손님을 맞이하고, 한의원 보조 일을 익히고, 점심시간 정리와 오픈 마감 청소.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도와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어디서도 느끼지 못할 따뜻한 정을 느꼈다. 여기저기 소변과 대변이 튄 화장실을 청소하고, 일을 마치시고 오신 한 할아버지의 양말을 벗겨드리다가 스멀스멀 코를 찌르는 발 냄새에 취하기도 했다. 거동이 쉽지 않으셨던 할아버지 한 분이 한의원 침상에 소변을 지리셨을 때에도 나는 걸레를 챙겨 와 군말 없이 치우고, 바지를 닦아 드렸다. 자주 깜박깜박하시는 한 단골 노부부는 한의원에서 금반지를 잃어버리셨다며 경찰까지 불러와 우리를 도둑 취급하셨지만, 며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침을 맞으시며 이것저것 요구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언짢던지. 행복하기도 무척 행복했고, 비보들을 접하며 마음 아파했고, 때론 고약한 일들에 툴툴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어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의 재산이 되었다.
그 시절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난 한의원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르륵 지나간다. 한의원에서 지냈던 1년의 시간은 이미 가슴속 깊게 새겨져 수많은 시간에 걸쳐서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