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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두부 Feb 02. 2021

낙지볶음엔 맥주죠.

"The things that you frighten you are dangerous to believe.

You are a person of your own choice."-Alice in Wonderland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 것을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예전에 읽던 책을 다시 열었다.

저자는 그때 이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닐까!

그의 비밀스러운 암호를 풀어낸 것만 같은 기분에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나는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책꽂이로 갔다.

진찰을 받는 내내 어떤 문장이 생각이 났는데 정확하게 기억나지않아서였다.

어디쯤인지 모르겠어서 첨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내 마음과 맞닿는 부분이 많아서 여기저기가 접혀서 이미 뚱뚱해져 있던 터였다.

근데 그 접은 부분은 지금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접지 않은 부분이 새롭게 읽히고 있었다.


지금 사실 나는 아프다.

그래서 병원을 다니느라 11월을 몽땅 도둑 맞았다. 벌써 12월이다.

별일 아닐 거라고 시작한 병원 나들이가 마치 이상형 월드컵을 뽑는 것처럼 한 단계씩 올라가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울트라 사운도로 끝날 일이 바이옵시로 그다음은 CT로...

미국 병원은 일을 참 천천히 하는 경향이 있으셔서 (비꼬는 중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말인즉슨, 그 시간만큼 나는 이미 상상으로 수술을 두어 번은 했고 장례식을 두어 번은 치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느려터짐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진찰과 검사가 진행되는 한달 동안, 나는 차를 한잔 우려 놓고 알맞게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시간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앨리스를 그릴 수 있었다. 노동은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영어단어로 환자(patient)는 그 뜻 그대로 '참아'내는 사람이다.

처음에 나는 앞으로 닥칠 그리고 참아내야 할 변화때문에 겁먹고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인간에게는) '정신'이 있다.


나는 오랜시간 머릿속으로 삶에 대한 나만의 여러 가지 이론들을 쌓아 왔는데,

지금은(당연히!) 불쌍한 내 몸뚱이를 가장 먼저 돌보아야 할 시기이지만, 

사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내가 다져왔던 정신적인 것들이 나를 이끌어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려워 그것에 휩싸이거나 의존하거나 혹은 그 두려움을 믿어버리는 실수를 나의 정신은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무너지고 있는 내 자존심을 잘 지켜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아침, 병원 주차장에서 나는 인생의 복불복 게임을 앞두고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며 차에서 못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던 하나는 좀 쉬운 길이고 하나는 좀 복잡한 길일뿐 나를 망치지 못할 것이고 쉬운 길이라고 너무 안도할 필요도, 어려운 길이라고 너무 상심할 필요도 없다고 다짐하며 차에서 내렸다. 원래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messy 한 거니까...라고 말은 하지만 닥터의 입에서 암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나 떨고 있니?"였다.


저번 진찰때 의사선생님이 종양이건 암이건 수술은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흉터에 대해 잠시 언급을 했었는데 그때 나는 흉터고 나발이고 살려만 주세요 모드였다.

근데 종양이라는 결과를 듣고나니, 

몸이 슬금슬금 살아나고 

그렇게도 굳건했던 내 정신은 안도의 담배를 한 모금 빨려고 잠시 베란다라도 나갔는지... 

나는 그만 넌지시 의사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얼굴인데...흉터 없이 예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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