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목이 시큰거린다.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무쇠 프라이팬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통증은 최근에 구입한 조리기구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열정적인 '예술활동'으로 생긴 통증이다.
내가 어렸을 적, 아이들이라면 방과 후 모두 노란 가방을 들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시키는 엄마야 그 당시 다~ 계획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나는 어떤 목표의식도 없이 피아노 학원에 다녔었고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는 마의 체르니 40번을 넘지 못하고 끝이 나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도 다~무슨 계획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들이 남겨놓은 피아노가 거실 한편에 남게 되었다.
아무도 치지 않는 먼지 쌓인 피아노를 닦을 때마다 처분을 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수북이 쌓인 악보를 쳐다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도 났다.
나는 눈에 들어오는 아무 악보나 펴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당시에 둘째 아이의 자폐증세가 심해져서 녀석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소리에 지쳐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그 소리에 대한 방어기제로 피아노 뚜껑을 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일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족과 관련된 일인가, 먹고사는 문제에 관련된 일인가, 미래를 보장해주는 일인가에 대해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기준대로라면 피아노 칠 시간에 아이들 밥반찬이라도 하나 더 만들어놓는 게 내 본분에 맞는 일이라 생각했을 법 한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내 마음은 조금 달랐다.
신기하게도 몸으로 익힌 기술은 30년이 흘러서도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치는 피아노 소리는 엉망진창이었다.
그 소리는 바보스러웠고, 부정적이었고, 극복하지 못했고, 슬펐다.
나의 허접한 연주는 꾹꾹 눌러서 덮어놓았던 나의 마음을 가식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말이나 표정, 몸짓은 의도적이건 습관적이건 가짜로 보여줄 수 있었지만 피아노 소리를 꾸며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솔직한 내 마음이 들통났건만 피아노 소리 안에 나를 탓하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참을 필요가 없었다.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밭이 두 마지기가 있다면 나는 한 마지기에는 꽃을 심을 거다."
이말이 떠올랐을때 그간 나는 농산물 수확량만을 가지고 나의 행복을 가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쓸모가 없는 일을 좀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쓸모가 없는 일은 하는 것이 꼭 쓸모가 없는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날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서, 이것 역시 내가 그토록 존경에 마지않던 실용적이고(practical) 생산적인 일(productive)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피아노 치기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의 피아노 실력은 쉬운 뉴에이지 곡을 초견으로 겨우 치는 수준이지만 아마추어에 대한 관대함 덕에 나 스스로가 완벽한 연주에 대한 강박이 없었고, 행위 자체에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남편은 내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도 피아노 연습만은 놓지 않는 걸 보며 '몰락한 귀족' 같다고 농담을 던지곤 한다. 그가 보기에 당시 나의 마음 상태와 그저 아름답기만 한 피아노 선율이 서로 이율배반적이게 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던 등 따시고 배 불러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이 고상한 소일거리의 시작은 사실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고 원래 나로 돌아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나로 돌아가기 시작한 이후,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피아노 치기가 나를 구제해 주었다면,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다가가 정보나 지식을 넘어서 위로가 된다면 그것이 예술의 힘이 아닐까.
대학시절 젊은 나는 예술을 오로지 공모전 당선에서 찾았지만 말이다.
잊고 있었는데, 대학시절 내 전공은 그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피아노 연주보다는 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어설픈 피아노 치기는 욕먹을 자신이 있지만, 익숙한 그림 그리기는 욕먹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과연 나를 진짜 자유롭게 해 줄지 의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지금 그만둔다면 나는 현실의 무거움과 덧없는 인생의 가벼움에 그만 꿀꺽 잡아먹힐 것만 같다.
그래서 그 불안을 잘 대처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조금씩 그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아직까지는 꾸준히 지키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팔목이 아프면 잠시 쉬어도 괜찮을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곡 중에 아름다운 상처투성이같은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곡이 하나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은 이 곡, Ballade No 4. 의 도입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곡의 시작 부분은 마치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거나, 천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노래 같죠.
이곡은 은은하게 시작해요. 아니 첫 음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죠..."
도입부의 피아노 선율은 마치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던 저 밤하늘처럼, 그 안에 항상 반짝이는 저 별들처럼, 이미 '나다움'이 있어 왔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