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저녁 노을은 늦게 진다.

Come as you are

by 손두부

우리 집의 절대 권력자,

아이는 집 안에서 왕 노릇을 한다.


밑에 거느리는 수하들은 고학력의 스페셜리스트들로만 구성되어있다.

Pediatrician 소아과 의사,

Developmental behavioral doctor 발달행동 전문의,

Psychiatrist 정신과 전문의,

Neurologist 뇌 전문의,

Cardiologist 심장내과 전문의,

Hematologist 혈액전문의,

Psychologist 싸이컬러지스트,

Behavior therapist 행동 떼라피스트,

Speech therapist 스피치 떼라피스트,

Occupational therapist 체육 테라피스트,

Pharmacist 약사 ,

보험회사 관리팀, 학교 헬퍼에 선생님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측근 신하이자 담당 요리사이자, 간호사이자, 비서이며, 그리고 동시에 우버택시 운전사인 나까지 아이를 보필해 오고 있다.

우리들은 일주일 단위로 혹은 한 달 단위로 그리고 해마다 정규 미팅을 갖고 왕의 안위를 도모한다.

이웃나라 왕들을 모시는 최측근들인 부모들끼리도 어떻게 하면 그들의 왕을 잘 모실 수 있는지 고급 정보를 주고받는 사교모임을 따로 가지고 있다.

물론 사무가 끝난 후 여가시간에도 심심할 틈 없이 엔터테인을 해 드려야 하는데 최근엔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기에 빠져있어서 나도 덩달아 우아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여가시간에 각자 피아노를 치거나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데 그것을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하며 집을 나선다.


“너네는 취미생활만 하는 귀족 같아.”


오늘은 피검사를 하는 날이다. 약의 부작용이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정기적으로 해오는 일 중 하나다.

랩에 일찌감치 예약을 해서 번거로움이 최대한 없도록,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일사천리 일을 진행하고 곧바로 떼라피 회사 소속인 아이의 담당 수퍼바이저를 대동해 병원에 갔다.

의사와 함께 대망의 피검사 결과를 살펴본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다.

“이렇게 해보죠”

의사는 새 플랜을 세운다. 플렌 B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임무를 파악하고 무슨 변화가 생기면 서로에게 곧바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병원을 나서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일단 이것으로 끝이다. 왕이건 신하건 밤이 찾아오면 잠은 자야 하니까.


나는 상처가 작을 때는 호호 불어달라 하고, 밴드에이드를 붙여달라 하고, 수선을 떨곤 하지만,

막상 큰 상처가 생기면 대충 쓱 닦아서 덮어버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무덤덤하게 다시 걸어가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나의 발걸음이 유독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낸다.

‘이건 뭐... 산다고 말하기엔 너무 별로잖아...’

그래도 일단 오늘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베이커리에 들려 탄수화물을 잔뜩 사 오는 걸로 구원의 손길이 없는 이 상황을 덮어보기로 한다. 그날의 걱정은 딱 그만큼 만 하는 걸로.


집에 돌아와 잘 준비를 마친 후, 요즘 들어 음대 언니 코스프레에 푹 빠진 나는 오전에 못했던 피아노 연습을 마저 하러 피아노 앞에 앉았고, 요즘 들어 미대 오빠 코스프레에 푹 빠진 아이는 오전에 그리다 만 그림을 마저 완성하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때 남편이 퇴근해 돌아왔다.

남편은 취미생활에 집중하지만 지친 얼굴을 하고있는 우리를 보고 또 한마디 던진다.

“너네 귀족 같아, 몰락한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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