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부터 병원까지 1시간 거리여서 아이와 나는 일찍 집을 나섰지만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집 앞을 나와보니 출근 차량들과 아이들의 등교를 위해 쏟아져 나온 엄마들의 차들로 길은 이미 분주했다.
동네 우버택시라고 자칭해오던 나는 샛길을 이용해 일찌감치 5번 산타아나 프리웨이 진입로에 도착했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마음이 늘 다급했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데려오는 일을 할 때마다 성격상 늦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일찍 집에서 나섰다.
서둘러 움직이는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애를 너무 애지중지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지만 나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남들이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곧 신호가 떨어졌고 나는 프리웨이로 들어섰다. 차량의 흐름을 따라 가속을 했다.
한국에서는 일명 장롱 운전면허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에 와서야 실전을 했다.
말도 안 통하고 길도 어색하고 표지판도 낯설었던 이민 초기 시절, 운전은 나에게 힘든 도전이었다.
종종 F로 시작하는 단어와 함께 한껏 추켜올린 가운데 손가락을 마주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엘에이에서는 어디라도 가려면 프리웨이를 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프리웨이를 들어설 때마다 아주 어릴 적 한국에서 봤던 복권 방송을 떠올렸다.
"자! 준비하시고~ 쏘세요~"
그 당시 일본의 국민가수 세이코를 닮은 예쁜 언니가 일요일 아침마다 그렇게도 활을 쏘아댔다.
그렇게 나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준 체 날아가던 화살처럼 프리웨이로 뛰어들곤 했다.
엘에이 카운티와 오렌지 카운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5번 프리웨이 길의 대부분은 시멘트로 포장되어있어서 강렬한 캘리포니아 햇빛을 그대로 반사했다.
나는 그날 아침 해를 마주하며 달리고 있었다.
길은 대형트럭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트럭이 줄지어 다니는 이곳 프리웨이는 망가지기 쉬운 부드러운 아스팔트보다는 눈이 부시지만 좀 더 강한 시멘트가 맞는 선택인 듯했다.
아스팔트였다면 수도 없이 나있는 팟홀을 피해 다니느냐 지금보다 운전이 더 곡예 수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에게도 선택이 남아 있을까?'
순간 드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거친 프리웨이를 달리는 것에 다시 집중했다.
곧 병원 건물이 프리웨이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큰 건물이라 쉽게 병원을 찾기는 했지만 출근 시간이라 로컬에는 여전히 차들이 많았다.
나는 왜 하필 이 시간에 약속을 잡았던 건지 전화예약을 했던 날을 떠올렸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시간을 강하게 요구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꽤나 깐깐한 성격이란 소릴 들어왔지만 미국에 오자 나는 어느 순간 미소천사가 돼있었다.
그 미소는 성격이 좋아서 나오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낯선 환경에서 오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 대한 자기 방어 같은 웃음이었다.
그날 나는 우스운 꼴을 당하기 싫은 마음에 이렇게 일찍부터 서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 우리는 가까스로 제시간에 오피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류를 모두 작성해서 간호사에게 넘기자 곧 호명이 되었다.
"아이의 경우, 평소에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으로 일어나는 수치이기 때문에 사실 먹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도할 방법은 약보다는 다이어트가 우선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거라도 더 신경을 써서 내릴 수 있는 만큼 내려보죠."
심장내과 의사는 다이어트를 먼저 해볼 것을 권했다.
"어쨌든 차선책이 있다면 그걸로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나저나 줄어드는 백혈구를 위해선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며칠 후 피 전문의를 만나러 이곳을 다시 와야 했기 때문에 병원을 나서며 다시 한번 길을 유심히 살폈다.
그날은 어차피 학교 수업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근처에 있는 몰에 가서 아이와 점심을 하기로 했다. 몰 1층에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이태리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줄이 길었다.
곧 차례가 되자 점원이 우리를 바로 출입구에 근처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Ca I go inside that corner?"
나는 점원에게 바로 자리를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
점원은 "Sure" 하고 웃으며 내가 요구한 안쪽 구석 자리로 다시 안내했다.
예전 같으면 굳이 요구하는 수고, 다시 말하면 아무리 짧고 쉬운 말이라도 영어를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곤 했었는데.
우리는 좀 전에 의사와 이야기 한 다이어트는 오늘 저녁때부터라고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콜레스테롤은 잠시 잊기로 하고 먹고 싶은 것을 주문했다.
"제나가 이사했어 "
아이가 툭하고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엘리멘트리 3학년 때부터 친했던 제나가 7학년즘에 이 근처 뉴포트 비치로 이사를 한 것이 벌써 2년 전 일이었다.
"제나는 지금 학교 수업 중일 테니 제나 엄마에게라도 전화 한번 해볼까?"
제나 엄마, 트레이시는 금발머리에 몸집이 좀 있는 나보다는 6살 정도 많은 학부모였다.
트레이시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학기 초, 학교 행사인 '백투스쿨 나잇' 날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같은 교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는 그날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트레이시는 그런 내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날 이후로 그녀와 빠르게 친해졌다.
늘 '영어친구'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최대한 미루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날 나는 바로 셀폰을 열었다.
이사를 간 이후에도 트레이시는 꾸준히 나에게 연락해왔었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트레이시는 전화를 받고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그런 만큼 영어로 길게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짧게 통화를 하고 바로 아이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트레이시와 아이는 한참을 떠들었다.
그들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 미국에 도착해 LAX 공항에 내렸을 때가 떠올랐다.
길의 모양도, 트래픽 사인도, 낮게 내려앉은 건물들도, 그래서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넓은 하늘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활한 하늘까지도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를 키우는 동안 이곳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때 나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이 곳 사람들이 말하는 가슴속에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앞에서 전화를 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지나온 시간들이 갑자기 '찰나'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의 삶이 누구나 동경할 만한 멋진 모습은 아니지만, 그간 어쩌면 계획된 대로 (도대체 누가 이렇게 계획한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잘 흘러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상황은 아까 출근길에서나, 좀 전에 병원에서나, 지금 막 들어온 레스토랑 안에서나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내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었고 나만이 혼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설렘 안에는 미약하지만 분명 불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불안이 내 감정을 앞서버리기 전에 나는 설렘을 내 옆에 꼭 붙잡아 두고 싶었다.
무엇이든 잘 되게 돼있으니 그대로 가면 된다고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이는 그 기분을 계속 반복해서 느끼고 싶었다.
아이가 전화통화를 하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미쎄스 트레이시가 놀러 오래. I wanna go."
"알았어"
이미 대답을 정해놓고 통보하는 아이에게 나도 빨리 대답해버렸다.
제나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쯤에 맞춰 우리는 제나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트레이시와 나도 그간 밀린 수다를 떨었다.
"You know what, 몇 달 전에 내가 계단에서 굴러 머리를 다쳐서 병원에 갔잖아. 덕분에 머리에 투머가 있는 것을 발견했어. 다행히 양성이었고 어쨌든 일찍 발견하고 간단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어. 늘 좋은 일만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늘 나쁜 일만 있는것도 아닌것 같아."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이미 내 마음을 읽었는지 흐트러져있던 나의 마음을 차곡차곡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그거 알아? 너 영어가 엄청 편해졌어. "
트레이시는 저녁을 먹이고 잘 시간 즘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나는 그녀와 허그를 한 후, 차에 올라탔다.
밤에 운전하는 프리웨이는 모르는 장소를 찾아갔던 아침보다 훨씬 더 가깝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시멘트길 마저 부드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음악을 크게 틀고 혼자만의 밤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운전하다 보니 저 멀리서 디즈니랜드로 나가는 출구 사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휘이이이익......... 펑!.... 휘이이이익......... 펑!"
나는 이미 그 소리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것은 매일 밤 디즈니랜드에서 나는 불꽃놀이 소리였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마음만 먹으면 저 출구로 나가 디즈니 근처에만 가도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물론 그러지는 않았지만.
소리를 듣고 있자니 독립기념일에 집 근처 공원에서 봤던 불꽃놀이가 떠올랐다.
불꽃이 터지면서 오는 격렬한 감동은 질리지도 않고 매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사그라들면서 뒤따라 오는 상실감은 앞서 보여줬던 화려했던 불꽃의 모습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예술은 결국 인생을 닮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러니 내가 뒤늦게 카메라를 꺼내 든다 한들 불꽃놀이의 상반된 두 가지 면을 모두 담을 수도 없고,
가장 찬란한 순간을 포착했다 한들 그것은 완전한 불꽃놀이가 아니게 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운전을 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가슴속은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스토랑에서 느꼈던 설렘이 아니었다.
이미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거기에 없었다.
액셀을 밟고 있는 오른쪽 발바닥에서 다시 거친 시멘트 길의 감촉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설렘이 있던 자리에는 분명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픔'도 '기쁨'과 똑같이 특별한 마음의 한 형태라는 사실에 집중한다면,
나는 그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적으로 내 옆에 붙잡아 두려고 애쓰거나,
혹은 멀리 내치려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늘에 꽃을 피웠다 사그라드는 불꽃놀이의 모양새가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면,
나 역시 계속해서 감정의 시소를 타는 것이 어쩌면 삶의 완전한 형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날 프리웨이를 달리며 그렇게도 내 옆에 붙잡아 두고 싶었던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