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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ug 30. 2022

잡초도 이렇게 살려고 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빌려 살기로 계약할 때 집주인 할아버지는 딱 한 마디 했다. 잔디만 죽이지 마세요. 집주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빌려 사는 입장에선 무척 감사한 말이었다. 암요. 그 말만은 지켜보겠습니다.


나와 황이 이 집에 들어오기 이전에 살던 노부부는 잔디 마당을 매우 깔끔하게 관리했다. 계약 전 집을 잠깐 보러 왔을 때, 우릴 맞이한 할머니는 떨어진 나뭇잎들을 곱게 빗자루질하고 계셨다. 그들은 종일 밭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게까지 마당 검질을 맸다('김 매기'의 제주 방언) 하니 참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그 말에서 잔디마당이 얼마나 노동집약적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집은 내부에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못질하며 맞추고 벌레가 들끓는 싱크대를 갖다 버리고. 집안 관리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해지면서 마당엔 자연스레 소홀해졌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처음엔 이것이 잡초인지 잔디인지 구분할 줄도 몰랐다.


첫 해에는 동네 철물점에서 양손 가위를 사다가 잡초와 잔디를 서걱서걱 썰어주었다. 원체 팔 힘도 없는 데다가 모기가 잔뜩 들러붙어서 쫓아내며 일하느라 속도가 더뎠다. 경상도 피가 끓는 내겐 용납되지 않는 느림이었다.


두 번째 시도로 수동 잔디깎이를 사봤다. 너무 잘 굴러가서 깜짝 놀랐고, 너무 잘 굴러가기만 해서 또 깜짝 놀랐다. 데굴데굴 잔디깎이 날이 돌아가며 잔디를 깎아줘야 하는데 잔디가 눌려 깎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동 잔디깎이는 수동 잔디눌리기가 되어 당근마켓에 금방 내놓게 되었다.

처음으로 장만한 수동 잔디깎이

잔디마당 관리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라는 옛 생각이 후회들을 줄줄이 낳을 때 즈음, 임의 아버지가 정원 관리를 잘하신다고 했던 얘기가 기억나 임에게 SOS를 쳤다. 마당이 난장판인데 나와 황은 무력한 애송이들이었다고. 임은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아버지는 마당 정리해주러 오신다고 했다. 땅을 대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하면서도 살았다!! 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임과 그의 남편, 형광색 경찰복을 입으신 임의 아버지, 세 명의 어벤저스가 집에 방문했다. 아버지는 마당을 두루 보시곤 큰 전동 잔디깎이와 작은 예초기로 정리를 시작했다. 잔디깎이가 지나간 자리마다 그간 햇빛을 보지 못한 갈색 잔디 밑동이 훤히 드러났다. 아버지는 마당을 몇 바퀴 돌며 깨끗이 정리하고 야자수와 소철도 깔끔하게 이발해주셨다. 임과 그의 남편도 플라스틱 갈퀴로 잔디를 정리하며 함께 고생해주었고, 나는 우리 집을 살려주심에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잔디마당을 망치는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임의 아버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은 안타깝게도 잡초들이 지분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바랭이 풀, 클로버, 민들레, 이외에 미안하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풀들. 일 하러 간다고, 바다 가느라, 모기떼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아서 마당정리를 미루는 사이 풀들은 엄청난 기세로 뻗어갔다.


잡초도 이렇게 살려고 하는데. 그의 숨통을 손수 끊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화분에 키우는 바질과 고수는 금이야 옥이야 돌보면서 마당의 잡초들은 별 볼일 없다고 뽑아내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집주인 할아버지께 잡초들도 그네들의 삶이 있음을 한번 재고해주십사 요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토록 뜨거운 잡초 사랑도 한여름날에 부려본 객기였음을 금방 알게 되었다. 며칠 전부터 찬 바람이 솔솔 불어와 마당에 자주 나가고 싶어지고, 그동안 마당에 신경 쓰지 못했단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니 말이다. 조만간 아꼈던 풀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전동 잔디깎이로 마당을 정리하며 잔디 보안관 행세를 할 거다. 그래야 내년에도 여기서 살 수 있다. 나도 이렇게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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