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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03. 2020

한음절의 위로, 술

일엽편주

농암 종택 전통발효주 일엽편주(一葉片舟).

최근 우리나라 전통주 수준에 깜짝 놀라곤 한다. 혀를 감는 듯한 인위적인 단맛이 도는 소주를 예전부터 싫어했고 텁텁하고 달며 심지어 다음날 끔찍한 숙취를 안겨주는 막걸리는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내게도 기피주(酒) 1순위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을 자주 다니고 또 대학 졸업 후 몇년간 거주하며 그네들의 술시장이 부러웠다. 종류면 종류, 맛이면 맛, 레이블이나 보틀의 디자인이면 디자인, 다양한 개성을 지닌 맛과 향이 좋은 술들이 참 많았다. 게다가 각 지역마다 명주가 있다는 것도 너무 부러웠다. 자연경관이나 물, 쌀 등 우리나라도 재료도 그렇고 뭘로 봐도 훌륭한 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우리에겐 없을까? 라는 생각을 오래 했다. 물론 시장의 수요랄지 세금 문제 등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 전통주 시장이 제대로 크기 힘들었음을 알게 된 것도 사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 막걸리 바람이 불어와 다양한 막걸리가 출시되어 세계적으로 우리의 막걸리가 알려졌고 제대로 만든 막걸리는 맛이 들척지근하고 머리 아픈 술이 아님을 알렸다. 송명섭 막걸리 라던지 복순도가는 나도 종종 찾을 정도. 또, 최근 마신 문경바람 시리즈, 고운달, 오미로제 스파클링 등은 그간 마셔온 어떤 증류주나 발효주보다 맛과 향이 빼어나 철학마저 느낄 수 있어 감동했다.

그러던 어제, 좋으신 분의 배려로 농암 종택의 전통주 일엽편주를 마시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농암 이현보가 누군가, 연산군 시절 간언으로 안동에 유배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궁정에 복귀해 오랜 기간 공직에 있던 분이 아닌가. 농암 선생은 은퇴 후 여러 시가(詩歌)를 남겼는데 그 중 어부가 첫머리가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만경에 띄워놓고 라는 싯귀다. 일엽편주란 망망대해를 떠가는 나뭇잎과도 같은 작은 조각배를 뜻하며 농암 선생의 종택에서 만든 전통주 이름 일엽편주는 이 싯귀에서 따온 것이다.

일엽편주는 감미료없이 쌀, 물, 누룩으로만 빚어 농암 종택의 장독에 숙성한 술이라고 한다. 얄쌍하고 단아한 보틀, 한지 위에 종암의 싯귀를 담아 부착한 레이블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사했다. 아주 맑은 술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잔에 따라 보니 속쌀뜨물 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하양을 띄고 있었다. 한 모금 맛보니 더 놀랍다. 프루티한 아로마에 산미가 감돈다. 이건 마치 와인에 가까운데! 아주 잘 만들어진 빈티지가 오래된 화이트 와인! 쌀로 만들어진 술이라 하여 나도 모르게 청주(사케) 맛이 날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예상이 상큼하게 깨졌다. 15도 라는 알콜 도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혀에 감도는 텍스쳐는 단아하고 그윽하며 균형감이 좋고 여운이 길다. 시간이 지나자 더 부드러워 지면서 미주(米酒) 특유의 고소한 맛이 희미하게 치고 올라오는데 마실 수록 놀랍고 자꾸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정말 잘 만들어진 술을 마실 땐 페어링할 안주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그 술이 가진 향, 맛, 질감, 이런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오롯하게 음미하고 싶어서다. 일엽편주가 딱 그런 술이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닌, 독특한 숙성 방식 때문에 스팟 형태로 조금씩만 출시하는 술로, 이 곳에서 만든 쌀 소주 맛이 그리 뛰어나다는 정보도 입수한지라  공지가 뜨면 광클릭으로 도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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