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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05. 2020

Lewina's 책일기, 책읽기

강화길의 소설 속 페미니즘

내키는 대로 책을 뽑아 읽다 고, 전에 읽었책이 문득 떠올라 그 책을 다시 펼쳐 읽다 고, 새로운 책이 눈에 밟혀 들이고...... 독서 습관이 이따위였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미독(未読)의 책이 한 짝을 잃어버린 신발처럼 여기저기 쌓여 자꾸만 책 모서리에 마음이 찔렸다. 책을 좋아한다면서, 그리고 나 또한 책 출간을 목전에 두게 되었으면서, 이런 방식은 과연 내게 유효한 독서일까? 라는 염려가 자라났다.

그래, 어릴 때처럼 한 권 한 권, 혹은 한 작가의 작품을 차곡차곡 버티컬로 읽어보자! 는 결심을 원고를 마감한 5월 즈음 했고 지금까지 조용히 고수하고 있다. 처음엔 잘 되지 않았다. 몇 페이지쯤 넘기다 집중력이 느슨해지면서 자꾸만 다른 책에 눈길이 갔다. 안돼 안돼! 이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 보겠어.

그 기간 중 읽은 책 중 강화길의 작품들이 있다. 드문드문 이름이 익었으나 작년까진 나를 사로잡지 못했던 작가. 그러다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집 속 대상 수상작인 '음복'을 읽자마자 작가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대체 이 작가 누구야? 강 화 길. 마침 강화길 소설집 <화이트 호스>의 호평여기저기 눈에 띄길래 이 작가를 한 번 파헤쳐 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1986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단편 소설 <방>으로 데뷔했다. 스물 여섯... 소설가가 되기에 알맞은 나이가 있겠는가마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동경과 부러움이 '바움쿠헨'처럼 도르르 말린다. 젊은 작가상 수장집을 마치고 화이트 호스(단편집), 다른 사람(장편 소설), 괜찮은 사람(단편집) 순으로 읽었다. 강화길 작가의 작품을 거의 읽은 셈이다.

종합적인 감상을 털어놓자면 당분간 그만 읽어도 될 듯 하다. 작품이 별로여서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지. 중간에 다른 책을 섞지 않고 폭풍처럼 읽어 내려갔고 스스로에게 부여한 미션이 끝나자 무거운 피로감이 나를 덮쳤다. 기쁨이나 희망을, 바닷가에서 주워온 각양각색의 조개껍질을 햇살이 가득 유리를 투과하는 창가에 늘어놓는 듯한 반짝이고 평안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래서.

세기말의 버려진(폐허가 된) 음습한 도시, 축축한 상자의 후미진 구석, 음험한 비밀로 가득한 고택, 뭐가 잠겨있는지 알아보는 일조차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늪, 정체모를 벌레떼, 기이한 공기의 밀도, 먼지가 한겹 내려앉은 가로등초차 돌보지 않는 변두리 골목의 불온한 어둠.

스릴러, 서스펜스, 호러, 심지어 오컬트적 장치가 여기저기 뾰족한 녹슨 못처럼 나즈막히 튀어나와 있어 자칫 닿으면 긁힌 상처로 녹이 스며들어 치명적인 파상풍에 걸릴 것만 같은데 이 세계 안에 '페미니즘'이 바람에 저를 누이는 풀처럼 심어져 있어 놀라웠다. 바람에 눕는 풀의 뿌리에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관심하지 않던가. 이 땅에서 페미니즘은 하잖은 취급을 받아왔다. 조롱의 대상이 된 경우도 부지기수다. 풀들이 억센 바람(폭력)에 서로의 몸을 부딪쳐 소리 내어 아우성 치면 뽑아버리려고 달겨 들었다. 고요하게 몸을 구부리는 풀들은 간신히 살아 남는다. 그러나 살아 남은 풀들도 안전하진 다. 때론 비난도 받는다. 풀로서의 정체성을 의심 받으며.

작가 강화길은 페미니즘을 정의라는 칼을 휘두르며 주장하지 않는다. 그 누구를 향해서도 직설적으로 꾸짖지 않는다. 가해자성도 피해자성도 무의미하다. 소설 속에서 폭력의 주체는 대부분 모호해서 비난의  가능성은 숨겨졌다. 그러나 여자로서, 겨우 생존한 약자가, 남은 삶으로부터 느낄 수 밖에 없는 진득한 공포와 좌절이 피부로 스미는 녹가루처럼 붉고 비릿하게 번진다. 그래, 녹과 피는 쌍생아처럼 그 채도와 냄새가 유사하다지.

결국 허황된 기대에 기대어 꽃이 되길 소망하기 보단 내가 누군지 모를(모르길 바라는) 잘 구부러지는 풀처럼 사는 것이 자그마한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가장 나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절망스러워서 당분간 강화길의 소설에 눈길을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분명 훌륭한 작가이고 상당히 코어가 강건한 '여자' 이며 물론 문장력도 뛰어나다.


결국,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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