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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02. 2020

영화롭게 말걸기

영화 만추, 김태용 감독

영화 만추
2010년
감독 김태용

기록에 의하면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만추'의 6번째 리메이크작이라고 한다. 이 6번째 '만추'에서는 전작의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그리고 남녀의 국적이 달라진다.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의 스산한 악의에 배반당한 여자 애나(탕웨이). 다정한 선의로 가득한 일상을 영위하던 애나는 현재, 유년의 온기과 연인의 기억을 안개에 묻은 채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란 신분으로 조용히 형무소 방 하나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 기실 남편의 죽음은 그녀로 인한 것이 아니었으나 삶에서 자유를 소거하는 행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치루어야 할 당연한 댓가라 여긴듯 하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깊은 침묵과 이음동의어가 된다.

꿈을 위해서 팔 수 있는 것이 몸과 시간뿐이라 그걸 주저없이 파는 남자, 훈(현빈). 훈의 꿈은 소박하기 짝이 없으나 낯선 땅에서 그저 몸뚱이 하나가 전부인 불법 체류자에게 기회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미국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싱긋, 웃으며 다 잘 될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끝내 훈은 그간 쉽게 팔아온 것들에 대한 댓가를 가혹하게 치르게 된다. 쉽게 팔아오던 몸과 시간은 이제 그의 목을 조이는 차가운 쇠사슬이 된다.

계절이 나쁜 것이다. 아니, 계절이 좋았던 걸까. Late Autumn(만추)라는 계절이 아닌 혹시 early spring 이었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어딘가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랬다면, 애시당초 그들의(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를) 조우가 운명처럼 다가오지 않았을테지. 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남자와 주어진 시간이 72시간 밖에 없는 여자가 건네주고 건네받는 시간은 시애틀 구석구석을 잠식한 축축한 안개를 닮아 쓸쓸하고 안타깝다. 시간이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장 비극적인 명제로 돌아온다.

호수와 안개에서 맺은 약속, 아마도 일생 단 한번 뿐일지 모를 화인같은 입맞춤으로 애나는  자기를 가둔 자리에서 지난 7년과는 다른 2년을 살았을 테지만(훈이 장난스레 말했던 경기는 별로지만 우리 식당은 잘되요, 속의 아내를 꿈꾸며 상대가 보고싶은 만큼만 보여주던 미소를 마음껏 지었을지도 모를 일), 지금 그녀가 서있는 곳에서 훈에게 건네받았던 시간을 다시 그에게 돌려줄만한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애나처럼 낯선 땅이 구형한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응징으로 지금쯤 어디선가 이름 대신 수인번호로 불리우는 장기수감자가 되었거나 사형을 언도 받았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알 길이 없다. 그저 기다린다. 커피와 안개 속에서 예의 둘이 했던 대사 놀이를 하며. 사랑의 악의에도 침묵하던 그녀이기에 어쩌면 매 해 그 날이 오면 그 장소에서 훈에게 시간을 되돌려 줄 만남을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있다. 만추 뒤에 오는 계절은 혹독한 겨울이라는 불변의 이치를.

김태용 감독의 전작 <가족의 탄생>이 상당히 인상깊었고, 필름이 유실된 최초의 원작과 비교하는 일은 현재로선 불가능하지만,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꽤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영화적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최초의 감상 이후 공기에서 가을이 맡아지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연례행사와 같은 영화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김태용 감독은 음악활동을 했던 경력 덕분인지 과연 장면과 음악을 매치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상과 음악, 그 어느 쪽도 튀지 않고 커피의 크레마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있다고 할까. 솔직히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아주 마음에 드는 장면과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의 낙차가 커서 감각적으로 꽤 피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애정하는 영화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로 기억된다는 건 감독으로선 가장 영화로운 축복이 아닐까. 일단 그에겐 탕웨이라는 세기의 연인과 함께한 작품이니 어쩌면 '만추'는 김태용 감독에게도 가장 강려크한 '인생템'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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