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사나운 날

by 서림

벌써 도착했어야 할 엄마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도착해 싣고 온 몇 개의 생선 하꼬짝을 뒷마당에 정리하고 생선은 곳간에 절여 둔 채 맥주 한 모금으로 피로를 푼다. 한참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자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집 앞 골목길을 열댓 번은 더 나갔다 왔다. 애꿎은 스쿠터만 만지작거리다 마당 한켠에 세워두고 다시 또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다. 비린 생선 냄새에 절은 바람이 온몸을 훑고 이미 달도 제 집 찾아 길을 나서고 있다.


그날 밤 장에서 늦게 집에 돌아온 엄마의 허벅지는 온통 검은색으로 멍이 들어 있었다. 어둠이 찾아든 늦은 밤이라 그을리듯 검게 멍든 허벅지는 어둠에 가려 색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조용한 밤에 엄마가 온 소리를 듣고 평소 살갑게 지내던 옆집 아주머니와 앞집 아주머니가 엄마를 찾았다. "아이고아이고" 바람 소리 같은 중얼거림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 모습에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다들 웅성거렸다. 뒷집에 살던 먼 친척 할머니까지 달려와 그나마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안심하기도 했으나, 평소 엄마에 대한 정이 깊은 아버지의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뿌연 입김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을 담은 때이른 바람에 연신 부딪히고 있었다. 달빛에 가려 숨었다 미끄러졌다 흔들거리며 백열등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엄마는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촌구석이라 의원이라고는 있지만 밤이 깊어 문은 닫혔고 택시를 불러 타고 작은 시내로 나간들 달라질 건 없었다. 낮게 깔리는 엄마의 숨소리에 작은 경련이 일었고 엄마의 흐느낌을 닮은 울음 같은 소리들이 어둠을 울리며 바사지고 있었다.


"이 오살 놈의 장사를 집어치워야지 사람 죽겄네잉" 얼마나 놀랐는지 슬리퍼 한 짝은 어디로 가고 맨발을 끌며 아버지는 성을 냈다 "맥없이 저러네 왜근데여. 정신 사나운 게 가만히 있으랑게, 오메 아이고 죽겄네"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 속이 상해 아픔을 숨기지 못하고 당신들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옆집 아주머니는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해보자며 내게 물을 끓여서 가져오라고 했다. 마음은 불안해 자꾸 콩닥거려 허둥대느라 곤로에 끓인 물을 엎질렀다. 나중엔 아주머니가 대야에 물을 받아 갔다.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검게 멍든 허벅지에 올릴 때마다 엄마는 "아이고 나 죽겄네잉" 꺼지듯 산더미처럼 무겁게 토해냈다. 밤바람을 타고 드문드문 날아든 새가 골목 앞 빈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마치 엄마의 신음처럼 길게 울렸다. "시방 병원 갈 데도 없고 어쩐데여. 사람 잡겄네잉" 아버지는 허리춤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어이, 이 사람아 사람을 태우러 가는디 술을 마시면 어쩐당가. 참말로 나 못 살겄네잉" 경운기에 엄마를 태우고 온 동네 아저씨는 한잔했는지 술 냄새가 났고 하필 엄마의 다리가 세워 둔 용달차와 부딪혔다. 술을 마신 아저씨가 용달차가 있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어둡고 좁은 길이라 피하지 못한 채 운전한 것이다. 평소처럼 엄마를 태우지 않고 온 당신을 자책하느라 자신에게 쏟아내는 아버지의 분노는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날 밤늦도록 앞마당은 불을 밝혔고 아주머니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불을 펴고 누운 엄마는 밤새 끙끙 앓았다. 엄마 옆에 누웠으나 엄마 다리가 신경 쓰여 몰래몰래 조용히 일어나 확인해야 했다.


장이나 들에 가는 날은 아버지가 엄마를 스쿠터에 태우고 다녔다. 그날은 남은 생선이 많아 절여 놓느라 아버지는 먼저 왔고 엄마는 팔고 쌓아둔 하꼬짝과 경운기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와야 했다. 운수가 사나운 날이다. 하필 엄마가 아버지 스쿠터를 타지 않고 경운기를 타고 온 날 사고라니, 새벽 내내 "오살 놈의 장사를 집어치워야지" 마음 여린 아버지는 눈물바람으로 밤을 새웠다.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은 신세타령으로 이어졌고 맥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어깨는 오래도록 집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시간이 지나고 호전되는가 싶더니 다리가 부어오르고 멍이 가시질 않고 걷는 것조차 불편해 고통을 호소했다. 오빠들은 엄마를 서울 S 대학 병원으로 입원시키고 검사를 받고 치료가 시작됐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했던 다리가 차라리 부러졌으면 한두 달 깁스하고 아물면 될 일이라 했다. 쉽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반년이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직 엄마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지만 아침에 일찍 아버지 아침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갔다. 엄마가 없는 집은 적막강산이었다. 고요가 찾아든 밤엔 아버지는 술로 시름을 달래고 난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적막하고 쓸쓸한 건 익숙한 날들이었지만 지붕의 무게를 안고 있는 듯 마음은 그리 버거워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계속될지 몰라 불안함은 컸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파종을 시작하는 이른 봄이었다. 지글거리는 봄빛은 겨우내 잠들어 있던 땅을 쪼아대기 시작했고 불어온 바람은 들판을 흔들어 깨웠다. 땅속 깊이 균열이 생기며 작은 풀들이 피어올랐고 자잘한 살얼음이 녹으며 물 흐르는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논과 밭을 놀릴 수 없었다. 동네 이장님이 생선집 아주머니가 입원해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시간 되는 집은 어느 날 언제 삼거리로 모이라는 방송을 했다. 함께 경운기에 타고 이동하자는 방송이었다. 비록 장사는 했지만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 많은 동네 분들이 나와 밭일도 논농사도 수월하게 진행됐다. 장사를 하느라 들일이 항시 촉박해서 간혹 동네분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엄마는 명절이 되면 그분들에게 김장철에 쓰는 큰 대야에 생선을 수북하게 담아 감사 인사를 했다. 엄마가 손도 크고 인심이 좋아 받는 분들마다 "오메 이게 뭐시다냐" 놀라곤 했다. 내가 어릴 때는 장사를 크게 해서 장날 팔고 남은 생선은 상회에 보내 보관도 했지만 더러는 집 곳간에 두고 집에서 해먹기도, 팔기도 했었다. 때때로 감사함을 전하는 동네분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하던 심부름이었다. 엄마가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듯 그분들 또한 엄마의 마음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날짜별로 나누어 감자 파종도 하고 고추 모종도 심고 벼도 심고 함께 일을 했다.


그 해 감사의 의미로 설에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엄마는 과일을 사고 떡을 하고 늘 하던 대로 잔칫상에 올릴 전이며 유과와 약과, 오꼬시를 만들었다. 회관 앞에 큰 가마솥 두 개를 걸어두고 떡국을 끓여 그날은 모두 그곳에서 보냈다.


퇴원하고도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밤마다 물을 끓여 찜질을 했다. 어떤 날은 굵은소금을 뜨겁게 볶아 수건에 싸서 그 부위에 올려 찜질을 했고 팥을 볶아 찜질하기도 했으니 엄마는 일생을 그 다리로 고생했다. 밭일을 할 때는 쪼그리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펴고 다리를 질질 끓으며 일을 했기에 일은 더디고 그만큼 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흙에 둘둘 말려 몸을 내어주고 있었다. 하늘이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참고 있던 삭신이 쑤신다는 말을 곧잘 뱉어 냈다. 기다렸다는 듯 빗소리에 "아이고" 통증을 토해냈고 그 목소리는 힘없이 빗물에 젖어 들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 없이 비가 내리거나 종일 서서 장사를 하고 온 날, 들에 나가 흙에 둘둘 말려 올 때는 밤이 늦도록 찜질을 하느라 옆에서 거들어야 했다. 식어버린 팥이나 굵은소금을 뜨겁게 볶거나 쇠 대야에 물을 팔팔 끓여 날랐다. 소금을 볶을 때마다 누레진 소금 낱알들이 타다닥 손등에 튀어 따갑게 쏘아댔다. 소금을 볶고 나면 벌에 쏘인 것처럼 내 손등과 팔은 벌건 무늬가 새겨져 얼룩이 생겼다. 뜨겁게 달궈진 팥이나 소금을 수건에 싸서 엄마는 다리에 올리고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옮겨가며 살을 데웠다. 벌겋게 살들이 익어갈 때마다 엄마의 살 것 같다는 말이 앙 다문 입에서 터져 나왔고 그제서야 얼굴이 편안해졌다. 식으면 수건에 싸여 있던 팥이나 소금을 팬에 다시 부어 데워오는 것을 나는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도와야 했다. 엄마는 간혹 시내로 침을 맞으러 다녔다. 다리에 좋다는 약을 지어오기도 했으나 좀 호전되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덧난 상처 위에 또 하나의 딱지가 들어차 앉듯 세월의 무게만큼 다리 통증은 심해졌다. 근심은 바람처럼 멈추지 않았고 하루도 집에서 쉬는 날이 없으니 다리는 더 이상 낫질 않았다.


치매가 온 뒤로 엄마는 종일 소리 지르고 악에 받쳐 악다구니를 부렸다. 나중에 내가 함께 살면서 혹여 그때 다친 다리가 아픈가 싶어 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해 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순둥해졌다. 말도 어눌해지고 소통이 안되니 분명 아프다는 말을 했을 텐데, 쇠약해져 뼈만 앙상했던 그 다리가 많은 날들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면 마음에선 한바탕 폭우가 지나간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선다. 엄마의 일생을 보고 자라 숙제처럼 껴안은 엄마의 인생 앞에 고생했다는 말이 얼마나 사치인지 때때로 말문이 막힌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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