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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Mar 11. 2021

내가 나르시시스트?

사랑하니까 고쳐주려고 그래!

나르시시스트는 우리말로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한다. 본인이 타인보다 낫거나, 비교 대상이 없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본인의 가치와 업적은 과대평가하고  타인의 가치와 업적은 과소평가한다.


자기애성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은 과도한 감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자존감은 타인이 이들을 좋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자존감은 대개 매우 약하다. 이들은 타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기준으로 본인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판단한다. 또한 타인의 비판과 질타에 민감하고, 이로 인해 굴욕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이 경우, 분노나 모욕 반응을 보이거나, 앙갚음을 할 수도 있다. 혹은 자만심을 보호하기 위해 상황을 회피하거나 겉으로만 받아들이는 한다. 이런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다.




부모님은 언제나 남매를 비교했다. 남매는 항상 오빠보다 더 잘하기를, 동생보다 더 잘하기를 요구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못 미치면 물론 체벌이나 비난 등이 꽂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숨 쉴 수 없을 만큼 지적질을 당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늘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때로는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늘 남보다 나아야 했다. 누구보다 나아야 했다. 늘 비교 우위에 서야 했다. 그래서 나와 비교 대상이 되는 상대가 싫었다. 나보다 잘하는 상대가 존재하는 것이 싫었다. 세상에 대한 미움이었다.


어느 날 친하게 놀던 반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 재밌게 놀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친구가 가고 엄마가 갑자기 친구의 신상을 물었다. 아버지가 뭐하시는지,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런데 마지막에 "공부는 잘하니?"라고 묻기에 드디어 아는 질문이 나왔다며 신나게 "응!"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등짝을 탁 때리며, "너는 공부 안 하고 뭐했어! 쟤보다 더 잘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괜히 혼나기만 한 나는 시무룩해졌다. 그 친구 때문에 혼난 것 같아서 그 이후로 사이가 어색해졌다.


얼마 후 이번엔 엄마에게 칭찬받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 어김없이 엄마의 질문이 이어졌고, 나는 자신 있게 "나보다 못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공부 잘하는 친구랑 어울려 놀아야지! 못하는 애랑 어울려 놀면 되겠어!" 하는 것이다!


뭘 해도 혼나는구나 싶어서 그냥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어른들은 그랬다. 시대상이 그랬다. 전쟁 이후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서 그렇다고 했다. 내가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밟히는 시대. 그래서 서열을 메기고, 그 우열을 따지고, 그보다 더 우위에 서려고 몸부림치는 것. 그것이 과할 경우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된단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지적질을 당했을까. 무얼 해도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까. 무얼 해도 부모님께 인정받지 못했을까. 그렇게 자란 나도 세상을 그런 각으로밖에 볼 수 없었까.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경쟁상대였다.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 거다. 사실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늘 남을 시기하고 질투했고,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봤다.


나는 특별하고 대단해야 했으며, 지금 조금 부족한 것은 내가 아직 좋은 때를 못 만난 때문이며, 언젠가 좋은 때를 만나면 누구보다 잘나질 테니, 너희 같은 갑남을녀 평범한 루저들은 나를 떠받들도록 하라~ 뭐 약간 이런 거만한 타입이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재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길밖에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선량한 척, 예의 바른 척, 위하는 척, 겸손한 척했다. 사실 내 마음은 상대가 밉고, 질투 나고, 만만하고, 하찮고, 귀찮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들키않기 위해 더 완벽한 모습을 꾸며냈다. 그런 꾸며진 모습을 사람들이 인정해줄 때마다 우쭐해졌고, 한편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었다.


'사실 그게 아닌데...'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이런 생각이 더 나를 숨 막히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우울감은 여기서 비롯됐다. 나와 다른 내가 늘 구석에 숨어있어야 해서. 진짜 나는 늘 어둠에 가려져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매 순간 꾸며내기만 해야 하니까. 그게 너무 힘들고 지쳤다.


그래서 나는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잘 내고, 사람을 경계하고, 감정적으로 예민했다. 그 화살은 모두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향했다. 나는 타인에게는 무척 친절한 편이었으나,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는 친절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됐다.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해도 안 됐다. 왜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나는 남편의 생활습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저렇게 하는지. 왜 양말은 저렇게 벗어두는지. 왜 옷은 저렇게 두는지. 쓰레기는, 티브이는, 밥 먹을 때... 등등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지적질하는 것일까? 사랑하지 않나?'하고 질문해보았다. 그랬더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니까 더욱 그랬다.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고쳐!'라고. 그런데 이게 관계를 악화시켰다. 나는 잔소리쟁이가 되어있었다.


나는 정말 나르시시스트, 자기애성 인격장애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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