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폭력적인 행동의 개선을 위해 심리치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르게 행동교정을 위한 대단한 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문가 선생님과의 활동을 통해 아이의 성향 등을 파악하고, 절대 해서는 행동 등을 지도받으며 그렇게 한 주, 두 주 시간이 흘렀다.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아이의 성향이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첫째와 내가 닮아 있었고, 아빠와 둘째가 성향적으로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주양육자라서, 둘째는 나와 상충하는 부분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첫째는 마음을 유도신문(?)하면 어찌어찌 털어놓는 편이다. 그런데 둘째는 자꾸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모른다고 하거나, 왜 자꾸 어려운 질문을 하냐고 하거나 귀찮아했다. 처음엔 숨기거나 귀찮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을 통해 알았다.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표현할 수도, 심지어 말로 표현하는 방법조차도 모른다고.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어려서부터 그런 부분에 있어 잘 소통이 되었기 때문에 아예 자기 마음도 모르고, 표현 방법도 모른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가만히 지켜보다 보니, 아이 아빠와 비슷했다. 그리고 남편도 내게 피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거나, 귀찮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나의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남편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를 때가 많거나, 또는 잘 깨닫지 못하거나, 알아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오해는 미움과 갈등을 낳지만, 이해는 배려와 타협을 낳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한 발 물러서서 갈등을 뒤로하고 타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와 다른 부분에 대하여 이해를 통해 기다려줄 수 있는 배려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통해 부부관계까지 한 발 나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미술활동을 통해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자연스레 털어놓는 과정이 있었다. 이것이 참 문제인 것이, 아이는 이런 부분을 엄마인 나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왜 자꾸 숨기는 걸까 고민도 했고, 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나 오해도 했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아이는 그렇게 마음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주 큰 발전이었다.
그리고 이 싫어하는 점에 대한 부분인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들을 아이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바로, 자기가 쓰던 컵을 가족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대로 쓰는 가족은 형과 엄마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요즘엔 당연하게 개인 물품을 철저히 구분하지만, 더 전에는 그런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먹던 걸 먹기도 하고, 먹던 컵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 둘째는 미친 듯이 마구 화냈다. 그럴 때 나는 둘째 편을 들거나 이해해주지 못하고,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화를 내냐며 핀잔을 주었다. 너무 자연스레 내 입장에서만 반응했던 것이다. 둘째는 많이 답답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생각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먹던 것을 '한입만' 달라고 하는 것인데, 첫째는 아무렇지 않게 준다.(이게 양보와 배려쯤으로 보였다) 둘째는 절대 싫다는데, 그게 꼭 욕심쟁이같이 보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남편이 자기가 먹는 그릇을 공유하며 먹는 것도 싫어하는 점을 떠올렸다. 많이 먹고 적게 먹고를 떠나, 그저 그 행위 자체가 '침범'이라고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들의 행동들을 너무 내 입장에서만 '해석'하고 있었다. 이게 부모의 흔한 오류 아닐까. 아이 하나하나마다 개성이 있고, 좋고 싫음이 분명히 다른데, 그것이 배려나 욕심으로 재단할 문제란 말인가! 진짜 내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이제 둘째도 이해받아야 했다. 아빠와 성향이 비슷하다지만, 아빠는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니, 오히려 불편하다는 표현마저도 "괜찮아"라며 묵살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적어도 내가 첫째를 성향적으로 이해하는 만큼, 아이를 머리로 이해해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의 불편하다는 호소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진짜로 불편한 것인지 가만히 지켜보고, 질문하고, 이해해주었다. 아이는 자기가 이해받기 시작하자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항상 답답해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썩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공격성이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도 아이가 많이 달라졌다며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너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