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온도계로 눈이 간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이 신기해서이다. 에어컨으로 맞추려면 간담 서늘해서 맘대로 못 켜는 기온 21도라니! 이처럼 신기함을 몰고 가을은 느닷없이 나타난다.
여름이 밀려갈 때쯤이면 아버지가 생전에 늘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야이야, 아무리 덥다케도 처서만 지나면 덤불 밑이 훤해지는 기라."
처서만 지나면 푸른 잎이 기상을 잃어 마른 잎으로 떨어져 나간 술렁함을 일컬음이리라.
나는 아버지를 몹시도 싫어했다. 술과 여자로 평생 어머니를 힘들게 했으니까.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가 얼마나 안 돼 뵈든지... '뼈 빠지게
돈 벌어다 줘도 마누라와 자식이 한 통속이 되어 왕따로 만든다'는 작금의 아버지들의 하소연과는 근본이 다르다. 허구한 날, 번 돈의 대부분을 밖으로 뿌리고 다니는 바람에 어머니가 평생 구멍 난 살림을 메꿔야 하는 세월을 살았으니까.
그렇게 앙숙이더니 지금 천주교 공원묘지에 나란히 누워 계신 두 분을 생각하면 가끔씩 웃음이 새어나기도 한다. 거기서도 왕왕 싸우시나...하고.
그런 아버지인데 요즘 들어 문득문득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되돌아보니 자식 넷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은 혼자 독차지하듯 받았는데, 어머니를 힘들게 한다는 반감 때문에 고마움으로 받지 못했던 날에 대한 미안함이 이제야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게다.
택시가 귀했던 1960년대. 비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따라 나와, 학교까지 걸어가면 비 다 맞는다. 택시 타고 가거라, 하며 차비를 챙겨주었고, 저녁마다 요 밑에 내 교복 주름치마를 깔아서 다린 듯 날을 세워놓기도 했다. 또 집을 나설 때면 아래위로 훑어보고 옷에 묻은 실밥이나 머리카락을 떼내며 자고로 여자는 복장이 단정해야 되는기라,하던 아버지.
한 번은 비 오는 날 우산과 장화를 들고 내 반까지 갖고 오셨다. 구부정한 자세에 휘적휘적 긴 두 다리로 걸어오는 모습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그날 나는 학교까지 뭐하러 왔냐며 퉁퉁 부은 얼굴로 등을 밀쳐 보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움과 궁금함이 가슴을 파고 든다. 방탕한 삶을 살던 아버지가 내가 몇 반에 다니는지 그날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사는 데 찌든 어머니가 알았을 리도 없는데 말이지…
평생에 가족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 갑자기 자식에게 나는 어떤 엄마인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내가 떠난 자리에 어떤 기억으로 남겨질지도...
이제 내 나이, 세상을 떠나던 아버지의 나이를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니 그 미움은 희미해지고 내게 준 사랑만이 남는 것처럼, 나도 내가 저지른 잘못은 잊히고 내가 준 사랑의 기억만 남겨지길 바람해 본다.
그리고 오늘 문득 다시금 깨닫는 것.
끝내는.... '사랑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