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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서 치유까지

<채식주의자>를 읽고

by 김두선


'타인이 대신 앓은 나의 상처’


책을 덮으려는데 에필로그에서 발견된 이 구절이 내게 와 박혔다. 그랬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영혜의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그녀 언니의 고통 속에 있는 나를, 또 하나의 내가 선명히 들여다보았다. 뒤돌아 볼 틈 없이 허겁지겁 살면서 한 번도 다독이지 못한 가슴앓이가 세월과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고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상실된 언어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라진 것도 승화된 것도 아니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으로 도서업계의 화제가 <채식주의자>에 집중할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구성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했다. 입체적인 시점의 구성도 그러했지만 프로이트를 생각나게 할 만큼 자주 등장하는 꿈 이야기나 문체의 표현이 눈에 띄었다.‘길지도 짧지도 않은, 힘 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눈을 뜬 채로 잠든 것 같은,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등...’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그 어디쯤으로 모든 것을 설정하고 있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튀지 않는 보통의―그저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의 이야기임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용은 3부작으로 주인공 영혜의 부부, 영혜의 언니 인혜 부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영혜는 어린 시절 가부장적이며 폭력성이 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다. 어느 날, 그녀는 집에서 키우던 개에게 물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자신을 문 개를 학대하는 아버지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쭉 지켜보았고, 또 그 개로 끓여준 국을 삼켰던 기억이 훗날 죄의식과,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트라우마에 빠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명치끝에 고깃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그녀는 늘 답답함을 느꼈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되풀이되는 꿈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어릴 때 받은 충격적인 경험이 무의식의 상처로 남는 것은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더구나 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 아이는 모멸감과 폭력성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말에도 설득당하지 않고 거부하거나, 공격성이 잠재된 불안정한 인격체로 자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돌아보면 요즘 뉴스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어른들의 아동폭력 행각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내 기억 속에도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영혜의 억눌림에서, 여섯 살 지우의 상처에서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억눌림이었으며, 또한 내 아이가 내게 받은 억압과 모멸감이었다. 결코 대물림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는데,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나도 얼마간은 내 부모와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는 것을 한참을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연히 꾼 꿈을 시작으로 영혜는 육식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조현병 증세를 보이며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녀의 남편은 이혼을 결심한다.

잘 계산되었던 결혼의 출발처럼 그는 이혼의 계산에 있어서도 빠르고 냉정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이를 얻기 위해 섶을 들고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여성들은 예식장에 입장하는 게 아닐지. 그러나 물질이 인간을 우선하는 자본주의의 폐단은 부부라는 탄탄한 지층을 지진 속에 들여놓았다.


인혜의 남편은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에너지는 오직 자신이 관심하는 예술 분야에만 집중되고 있었다. 영상 예술가인 그는 어느 날, 처제의 엉덩이에 있다는 몽고반점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영상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자 하는 오랜 숙원을 꿈꾸며 마침내 처제와 자신의 몸에 보디 페인팅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그는 처제와의 금기를 깨고 말았다.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온 인혜에게 남편의 배신은 얼마나 헛헛한 것이었을까. 물 없이 고구마를 삼켰을 때 오는 콱 막힘처럼 인혜의 거듭되는 인내를 향한 작은 분노가 꺽꺽 소리를 내며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그는 묵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회적 묵인에 의한 남편들의 욕망은 숱한 인혜에게서 자신의 면죄부를 요구한다.



영혜의 전신에 그려진 색채가 화려한 꽃 그림. 그녀는 이것을 일종의 부적처럼 느껴졌을까. 그녀는 문신처럼 그려진 꽃그림 때문에 무서운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치 식물이라도 된 것처럼 차츰 나무가 되어가는 착란증세를 보였다.


아버지의 폭력성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모멸감, 사용가치가 없어진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린 냉정한 남편, 형부의 탈선, 금기를 범한 대가에 의한 언니의 심판. 그녀는 주변인들에 의해 여러 번 죽임을 당했다. 영혜의 물구나무서기는 이런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며, 또한 폭력과 이기와 관습에 저항하는 외부 세계를 향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책을 덮는 순간 나는 썩 개운치 못한 감정과 만났다. 성실의 페르소나 뒤에서 오늘도 피해자로 내몰리고 있는 여성들의 척박한 삶. 이렇게 말한다면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발상으로 치부될까.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 피해자와 가해자로 굳이 나누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에겐가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그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 주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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