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과 ‘스승’의 어감이 다르듯이
‘학생’과 ‘제자’의 어감에도 차이가 있다.
평생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던 나에게는 ‘제자’라고 부르고픈, 특별히 오래 만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몇몇 아이들이 있다.
그 얼굴만 떠오르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해서 체면도 마다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찌하랴. 아마도 지금은 불혹을 갓 넘긴 중년의 나이쯤 되었을 텐데...
#이 질긴 동산 양말에 ‘빵꾸’가 나도록
어느 하루 학원 문을 닫고 퇴근을 하려는 참이었다. 얼굴에 핀 마른버짐으로 초췌해 보이는 깡마른 체격의 여자 애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선생님이 원장님이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매달리듯 말했다.
“저를 반장 좀 만들어 주세요. 꼭 반장이 되고 싶어요.”
외모로 사람을 평할 일은 아니지만, 얼핏 보아도 반장 감으로는 곤란한 듯 보였다. 그 시절만 해도 일단 여자가 반장이 되는 것부터가 언감생심이었
고, '예쁘면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남학생 표의 기준을 만족시키기에도 어려울 성싶었다. 하지만 그 도전과 결기가 대단타 못해 애틋하기까지 하니 어찌 모른 체하랴.
어떻게 반장을 만들어 내지...?
밤새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여자아이로서는,
아니 그 시절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음직한 민망한 대안 하나를 제시했다. 원고를 받아본 아이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단호히 말했다.
“할게요.”
기다리던 운명의 날. 3학년 일 학기까지 반장 도전에 다섯 번을 실패한 그 아이는 결국 ‘몰표’라는 성공
적 표차로 당당히 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그 사립학교는 일 학년부터 매 학기마다 반장을 선출했다.)
한 번 사람을 알아보면 그때부터는 외모보다 됨됨
이와 능력이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이후 그 여학생은 6학년 전교 부회장의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다. 일선에 나서고 싶지 않다는 부모님의 뜻으로 전교회장에 도전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여러분이 저를 뽑아 주신다면 이 질긴 동산 양말에 빵꾸가 나도록 뛰겠습니다.”
신고 있던 흰 양말을 확 뒤집어 벗긴 다음, 한 손에 높이 들고 흔들었던 그 몸짓은 변형을 거듭해 가며 지금도 학교 선거연설의 이벤트로 진행 중이다.
그 아이에 대한 내 기억의 시계는 한참의 세월이 지난 어느 하루, 대학생이 되어 찾아왔던 날에 멈추어 섰지만.
# 겉옷이 벗겨진 채 도망치다
한 어머님이 학원 문을 두드렸다. 초등학교 오 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이마를 잔뜩 찡그리며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곁에 서있다.
상담실에 앉자마자 학부모의 하소연은 시작됐다.
집에 손님이 와도 도대체 나와서 인사할 줄을 몰라요, 학교에서 발표할 때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절대 손도 안 들어요...
아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어머니는 끊임없이 속상함을 쏟아냈다. 상담이 마쳐지고 입학원서에 몇 가지 기록을 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순간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뒤쳐 나갔고, 아이를 붙잡은 어머니
의 손에는 벗겨진 윗도리만 허물처럼 쥐어져 있었다.
다음 날 어머니의 손에 이끌린 아이가 다시 나타
났다. 어머니는 수업 내내 아이의 옆자리를 지켰고, 한 사흘쯤 지나서야 혼자 올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다 하는 것을 저만 혼자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존심을 슬쩍슬쩍 부추긴 내 작전에 걸려든 결과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이 있다.
뼈대 없는 미물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안
는다는 말 아닌가. 무조건 요구하거나 막무가내로
명령하면 자존심을 손상 입은 아이는 더 엇나가
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타인에게 받은 부정적인 느낌 중에서 ‘경멸’은 은근히 당하는 일로 내가 왜 이런 부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지, 하는 원망을 유발한다.
‘모욕’은 언어나 행동으로 상대를 격렬히 공격하는 것으로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숱한 세월이 지나도 남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긴다. 문제는 경멸이나 모욕 등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아이는 반성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적하고 꾸지람하되 반드시 그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주어야 한다. 잘못하니까 혼내고 답답해서 꾸짖었겠지만, 채찍만 주고 당근은 주지 않았는지 되짚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일 년 뒤 그 아이는 학원 행사 무대에서 폭소를 자아
내게 하는 여자 분장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날, 누나 셋 밑의 삼대 외아들에 대한 어머님의 불만은 웃음과 함께 말끔히 날아가지 않았을까.
"우리 아들은 선생님이 키워 주셨다 아입니꺼."
언젠가 회 센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어머니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줄을 한 가닥으로 꼬아서 옥시글옥시글 오늘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