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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르다 Jul 02. 2023

고통보다 깊은


고통은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다.


의사인 폴 투르니에의 마지막 저서 <고통보다 깊은>에서도 이 부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투르니에는 "중요한 것은 사람이 고통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라고 썼다. 


건강을 위해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막내 동생과 불치에 가까운 '근긴장이상증'으로 2년 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언니를 두고 혼자 베트남에서 즐겁게 놀다 오는 것 같아 그 곳에서도 신실이, 그리고 써니 생각이 많이 났다.


고작 두 시간 되는 시차로 새벽 다섯 시에 깨서 해 뜰 무렵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일출을 혼자 보고 있자니, 죄책감마저 들었다. 


여행 내내, 또 돌아와서도


폴 투르니에의 마지막 작품인 이 책(아마 친정에 있는 것 같은데 찾기 어려우니) 사서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력한 의술 시스템은 환자를 수동적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선희가 2년 넘게 앓고 있는 근긴장이상증 같은 경우엔 현대의술이 강력한 처방이 불가능한 병이다. 난치가 아니라 이 정도면 불치병인 듯. 대학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면 환자 입장에선 삶의 한 가닥 희망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아산병원에서 이미 한 차례 시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고, 건대, 신촌세브란스, 강남성모 등에선 '뇌심부자극술' 외엔 치료 방법이 없다고 말 한 상태다. 전신마취가 아니라 부분 마취로 뇌를 열고 장시간 진행해야 하는 수술인데, 이마저도 완치는 어렵고 수술을 한 이후 경과를 관찰한 후 효과가 있으면, 가슴에 배터리를 넣는 수술을 한 차례 더 해야 한다고.


다음 주엔 이쪽 분야 연구를 오래 하신 한의사 선생님이 계신 한의원을 예약해뒀다.


계속 악화되고 있는 선희를 보고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기도할 때마다 "왜?"라는 질문이 여전히 내 안에서 올라온다.


"하나님, 대체 선희가 뭘 잘못했길래요?"란 원망이 터져 나와서 펑펑 운 적도 있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끝날 것 같지 않은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때, 난 믿음 안에서 어떻게 고통에 반응할 수 있을 것인지. 고통과 아픔 없이 창조적인 무언가를 캐낼 수 없다고 말하는 폴 투르니에는 실제로 고아로 성장했다.


20세기가 가장 사랑하는 기독교 상담자란 별칭과 걸맞게 그의 책은 고통에 대하 손 쉬운 처방전을 내놓거나,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긍정을 신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책에서 내가 얻었던 위로는 "상실성과 창조 사이에 일종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관계와 원인을 혼동해서 안 된다"고 말한 점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고통을 주신 것인가?"란 질문에 누구나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선희가 언젠가 나한테 그랬다.


"미햐, 하나님이 이 시간을 통해서 너에게 말씀하시고 또 가르치고 싶으신 것이 있을 거야"라고 누가 나한테 말해줬는데, 난 그 말을 듣고 전혀 위로가 안 됐어"라고.


이 문제에 관련한 기도를 쉬지 않기를 기도하는 주일이다.


**


자크 사라노(Jacques Sarano) 박사는 그의 저서 <이중 인간>에서 이 논의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두 명의 모순된 인간이 살고 있다. 바로 비판적 인간과 윤리적 인간이다. 비판적 인간은 객


관성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현상의 연쇄성, 원인과 결과라는 냉혹한 


연쇄 사슬만을 인정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역시 냉혹할 따름인 유전자 프로그래밍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목적론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한편 윤리적 인간은 자신을 책임 있는 주체로 판단한다. 세라노는 "철학적 합리성이라는 명분으로 비판적 인간을 위해 윤리적 인간을 제거하는" 베르제를 인용한다. 분명 이것은 앞에서 말한 모순에서 쉽게 벗어나는 방법이다. 세라노는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자유 의지를 반박하고 폐기 처분하여 손을 털고 난 후 잊어버리면 그만인가? ...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와 인간의 근본적 모순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것이 철학적 성찰이며 인간적인 사고가 아닌가. 어찌하여 윤리적 주장이 비판적 증거보다 덜 '철학적'이란 말인가?


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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