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중학교 2학년 때의 체력장 하던 날이 생각난다. 유난히 생활 체육 증진에 열 올렸던 체육선생님의 으름장에, 도어쩌구로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을 운동장으로 움직였다. 오래 달리기. 다섯 개 단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의 매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신발 밑창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드르륵드르륵 모래 바닥에 운동화를 끌며 억지로 출발했다. 매를 든 추격자를 피해 억지로 달리던 삼사십 명의 중학생들이 일으키는 먼지바람이 메마른 운동장에 가득 찼다. 운동장을 반 바퀴를 돌았을까.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합기도며 수영이며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부모님의 억지로 시켰던 운동들은 달리기를 하는 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숨을 헉헉 몰아 쉬면서 애써 달려봤지만 중간쯤 이미 선두와 한 바퀴 이상 차이 났다. 목표를 달성한 아이들이 운동장에 주저앉아 마지막으로 남은 나의 초라한 달리기를 구경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포기할 순 없어 거의 걷는 속도로 끝까지 발을 굴렸다. 노력한 꼴등으로 들어오던 패배의 순간이 선명히 기억난다. 폐부가 찢어질 것 같았던 숨 가쁨은 선명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달리기와 나 사이에는 아주 넓은 간극이 있었다. 당연히 1분 이상 달려본 적이 없었고, 길에서 마주치는 러너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걸 보기만 해도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와 저런 걸 하는 사람은 튼튼한 폐를 가지고 태어났겠지?' 하면서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운동의 영역이라 확신했다. 몸이 가볍고 심폐기능이 '태초부터' 좋은 사람만을 위한 운동인 러닝에 감히 나처럼 몸집이 크고 조금만 달려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사람이 도전하다니. 말도 안 된다 여겼다.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던 러닝과 데면데면한 사이를 조금 극복하게 된 계기는 나처럼 러닝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일반인'인 친구가 러닝을 시작하면서였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어?! 놀라움과 동시에 갑자기 해볼 만한 운동 같아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급속도로 저하되는 불안감과 집에 갈 때마다 높은 계단 앞에서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는 상황을 극복할 필요를 느끼던 참에, 친구가 한 번 더 러닝 해볼 것을 권해왔다. 마침 다이어트를 위해 헬스장엘 다니기 시작한 참이라 러닝 머신에서 아~주 가볍게 달리기를 해봐야겠다고 아주 갑자기 결심했다.
그렇게 멀어 보였던 러닝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힐 수 있었던 것은 러닝 가이드 서비스인 '런데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친구가 근 일 년 전부터 추천했는데 귓등으로 흘려버리다가 결심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1분 달리고 1분 걷는 프로그램이라 할만해.'라고 하던 친구의 말을 믿고 다운을 받았다.
런데이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통해 장거리 달리기를 훈련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작 지점은 30분 연속 달리기를 위한 8주간의 트레이닝 코스이고, 이후로 30분 달리기 향상 프로그램이나 50분 달리기를 시도하는 프로그램 등이 있다. 어휴. 30분은 말도 안 되는 목표고, 3분이나 4분 정도 달리는 걸 목표 삼고 시작했다.
첫 코스의 첫날의 훈련은 1분 달리기-2분 걷기를 반복해서 총 13분 동안 5분을 달리는 일정이었다. 아무리 달리기를 못해도 1분은 달릴 수 있겠지.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가벼운 시작이었다. 1분 달리기.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모든 시작은 1분 달리기를 시도한 그 순간부터였다. 고작해야 1분씩 다섯 번, 총 5분 달리기를 완료한 그날에 나는 이미 10km 달리기를 완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낸 것이다.
10km를 완주하고 나서 문득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오래 달리기는 도대체 몇 미터였는지 찾아봤다. 그렇게 죽을 것 같았는데 최소 3킬로미터는 되었을 것이다. 30분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분명히.
ㅎㅎ..ㅎ
고작 운동장 대여섯 바퀴를 뛰고 그렇게 고통스러워했었구나. 어린 시절의 심폐지구력이 통탄스러움과 동시에, 꾸준히 달성한 장기간의 달리기 기록이 더욱 자랑스럽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10km 코스에서 누군가를 응원하는 피켓 문구를 보자마자 지레 겁먹고 도망쳤던 많은 선택의 순간이 떠올랐다. 덩치가 커서, 재능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안 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앞에 더 넓은 가능성이 열렸다.
8개월 남짓 러닝을 해오는 동안 훈련한 건 심폐지구력만이 아니었다. 안간힘을 썼는데도 전혀 진보하지 않은 것 같은 하루를 견디고, 까마득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인내하는 힘을 길렀던 날들이었다.
이젠 꽤 멀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게 두렵지 않다. 해볼 만하게 느껴진다. 자신감이 생긴다. 멀리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어도, 기차 시간에 쫓길지라도, 늦잠을 자도 두렵지 않다. 그냥 달리면 되니까! (음?)
표지 사진 출처 : Photo by Ketut Subiyanto: https://www.pexels.com/photo/fit-tired-sportswoman-jogging-in-sunny-park-4426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