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1910년 일본은 제국을 확장하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한국인이 생계를 잃고 고향을 뒤로하고 외국 땅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견뎠다. 가족들은 견뎠다. 여기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이 있다.' 드라마 <파친코> 첫 장면에 나오는 자막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가 스트리밍 중인 <파친코>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까지, 역경을 딛고 선 자이니치(재일 동포) 가족의 4대를 그려낸다. 드라마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한국인들의 고난의 역사 이야기, 그리고 모든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야기다.
자이니치 가족 4대의 고단한 삶
드라마는 1915년 부산과 1989년 뉴욕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며 전개된다. 1915년 일제강점기 조선, 부산의 하숙집을 운영하는 양진과 훈이는 딸 선자를 똑똑하고 당차게 기른다. 시장에 총칼로 무장한 일본 순사들이 나타나면 조선 사람들은 모두 땅을 본 채 두려워하지만 선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선자가 성인이 되기 전, 부친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선자와 어머니만 남아 하숙집을 운영하며 근근이, 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간다.
청년기의 선자는 오사카 수산물 중개상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을 하게 된다. 한수가 오사카에 가족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걸 알게 된 선자는 배신감에 괴로워한다. 선자네서 하숙하던 선교사 이삭은, 홀로 아기를 지키는 강인한 선자를 바라보며 존경과 연민을 느끼게 되고 선자에게 청혼한다. 1931년 선자는 이삭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하고, 태어난 아들을 함께 키운다. 그리고 1989년, 노년의 선자는 손윗동서(경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들과 함께 60년 만에 고향 부산을 찾는다.
1989년 미국 뉴욕, 선자의 손자 솔로몬은 은행에서 일한다. 솔로몬은 유능하지만, 인종차별로 인해 승진에 실패한다. 그는 승진을 위해 도쿄 한복판의 낡은 저택 주인인 자이니치(일본에 거주하는 한인) 할머니를 찾아가 땅을 팔라고 설득한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할머니는 앞에 앉은 일본 자산가들의 무시하는듯한 시선과 태도를 보며 자이니치로서 겪은 핍박과 설움, 수모를 떠올린다.
“몸속의 한 맺힌 피가, 핏방울 하나하나가 이걸 못하게 막는다면, 그래도 사인하라고 하겠니?”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하지 마시라고.”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은 후 자리를 떠난다. 드라마는 솔로몬이 계약에 실패했지만 자이니치로 살며 핏속에 깊이 새겨진 ‘한(恨)’에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느끼고 빗속에서 춤을 추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자이니치들의 삶은 곧 이들의 역사
<파친코>는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자이니치 가정의 이야기다. 이 작품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자이니치(在日)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식민 지배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200만명 정도이며, 해방 이후에도 60만명은 귀환하지 못한다.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과 그 후손을 ‘자이니치’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최저층 계층민으로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자이니치의 역사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억압하고 차별했는지 과거를 고발할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한 일본인의 혐오와 차별의 현재를 보여준다.
“핀을 조정하는 거... 다들 이렇게 해. 혼자만 안 하는 바보가 되면 안 되지. 대부분 레버를 잘 당기면 파친코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손님들은 결과를 좌지우지 할 수 없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드라마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는 자이니치가 주로 파친코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파친코는 일본의 거대 도박 사업이다. 파친코의 황금시대는 1950년대 초반이었는데, 일본 내 점포가 3만 8000여곳에 이를 정도로 호황이었다. 이 파친코 사업을 시작한 것이 바로 자이니치다. 1925년 오사카에서 처음 선보인 파친코 기계는 이들의 발명품이었다. 당시 자이니치들은 제도권 내에서 직업을 구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파친코 사업은 자이니치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드라마에서 선자의 아들이 시작한 사업도 파친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도박이라는 점에서 파친코는 그 당시 자이니치들의 삶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이니치는 현재도 우리의 삶 주변에 존재한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도 동메달 수상자인 안창림은 자이니치다. 그는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며 ‘자이니치에 대해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하는 것도 선수인 자신의 사명’임을 밝혔다. <파친코>의 모자수 역을 맡은 배우 박소희도 자이니치다. 그는 ‘자이니치 배우로서 자이니치라는 단어가 영어사전에 올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때 까지 열심히 하겠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렇게 많은 자이니치가 일본의 압력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지, 드라마 <파친코>는 그 이유를 선자를 비롯한 한국인들의 투쟁의 역사를 통해 알려준다.
<파친코>가 세상에 말을 거는 방법
<파친코>는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애플tv+의 미국 드라마다. 드라마를 만든 주요 멤버들은 한국계다. 배우 중에도 재일교포가 있다. 한국계와 미국 제작진, 3국 배우의 시너지가 드라마 <파친코>에 시너지를 낸다.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드라마는 더욱 담담하게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를 말할 수 있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포악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그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갔던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이야기도 대놓고 하지 않는다. 선자가 부산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과정에서 과거 선자네 하숙집에서 일했던 복희를 만난다. 복희는 선자에게 지난 60년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일본인들이 일을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만주로 갔다는 이야기, 돌아왔을 때 선자의 어머니가 사라져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다행이었다는 이야기, 함께 갔던 동생은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스스로 끝냈다는 이야기… 그 험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일본의 쌀 수탈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양진은 결혼한 선자 부부를 위해 흰 쌀밥을 해주려 쌀 가게를 찾아간다. 하지만 쌀 가게 주인은 곤란한 듯 거절한다. 양진에게 쌀을 팔면 일본인이 쌀을 사러 왔을 때, 팔 쌀이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30년의 경우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내에는 늘 쌀이 부족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하지만 <파친코>는 쌀을 빼앗아 가는 악랄한 일본인의 모습을 강조하는 대신, 그 당시 한국인들은 먹지 못했던 쌀을 조금 구해와 딸을 위해 밥을 짓는 어머니 양진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고난을 보여준다.
<파친코>는 미국 사회에서 자이니치의 존재를 제대로 알리는 첫 작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파친코>가 글로벌적 관심과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담담한 어투로 전하는 강력한 ‘진실’이다. 감정과 아픔은 주관적이다. 아무리 객관적 근거로 뒷받침 된 역사라 할지라도 풀어내는 과정에서 민족주의나 자기연민이 강하게 투영된다면 그 사실이 오롯이 전달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사자와 바라보는 이가 느끼는 아픔의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전하는 아픈 역사는 타자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작은 자이니치 가족의 이야기 <파친코>가 지구촌 디아스포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세계가 주목한 이유다.
세상의 모든 디아스포라를 위한 헌사
나 또한 드라마를 보며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갔던 당시가 생각났다. 단지 유학생으로 살아갈 때도 힘들었다. 그 사회에 동화되려고 아무리 애써도 보이지 않는 벽들에 턱턱 막혀버리던 순간들,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고 말하는 눈빛을 애써 못 본채 넘겨야 했던 순간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꾹꾹 눌러 삼켜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물며 평생을 이국땅에서 차별과 혐오를 견뎌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의 고통은 어떤가. <파친코>는 세상 모든 이민자, 이방인들을 위한 헌사다.
드라마 <파친코>가 전하는 헌사는 구체적이기에 더 힘이 있다. 선자는 오사카 선교사인 이삭과 결혼한 뒤 오사카로 떠난다. 오사카에서 이삭의 형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된다. 선자는 오사카에 이주한 뒤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향수로 괴로워하는데 요셉의 아내가 차려준 쌀밥을 보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해준 쌀밥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고향의 냄새가 담긴 옷을 실수로 빨아버렸을 때, 더 이상 고향과 연결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는 마음에 힘들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타지를 떠나 생활하는 모든 디아스포라가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이다.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자이니치 작은 가정의 이야기가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디테일에 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통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파친코>는 우리에게 고난을 겪은 역사와 삶에 대한 태도를 제시한다. 아픈 역사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도, 상관없다. <파친코>는 끊임없이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서 담담하게 걸어가는 인물들을 통해 삶의 장애와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통찰한다.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역경도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선자가 보여준 삶의 역사 이야기가 있다. 역사를 딛고 일어나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걸어간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다. 때론 거대한 파도가 삶을 집어삼키더라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삶을 살아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