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아키 Dec 23. 2019

크리스마스가 이런 것이구나

2019년 12월, 크리스마스 피아노 학예회

서른 살이 되면 나의 도전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새로운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줄만 알았다. 도전이 주는 긴장과 떨림을 나는 썩 즐기지 않았다. 도전을 그리 즐기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30대가 되고 싶었다. 익숙한 일들을 일상적으로 안정적으로 처리하고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게 내가 어렸을 적 상상했던 서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렸던 서른 어디쯤의 모습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운다. 자발적으로 도전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도전들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뿌듯함과 홀가분함을 같이 안겨준다. 나는 다시 어떠한 경력도 없이 어딘가에 기대어 마구 질문하고 실컷 틀릴 수 있다.




두 달 전, 나는 회사 근처에 있는 수영장에 등록했다. 아침마다 수영장에 가서 물에 몸을 맡겼다. 물살이 내 몸을 지나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손으로 물을 가르면 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 친구 노숀이는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태권도를 한 뒤에 이마 위 땀이 미처 식기도 전에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사들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 짓는다. 역시 아주 맛있는 맥주가 되겠지.


비슷한 시기에 내 친구 빔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재즈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몇 번 말하다 결국 실행에 옮긴 것이다. 난 언제나 빔 안에 흐르는 멜로디를 더 적극적으로 듣고 싶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빔이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설레고 좋았다. 빔은 빌 에반스 곡을 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꼭 나중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달라 했다.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빔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 클래식류에서 학예회를 열었다. 빔을 포함해 그 피아노 선생님께 배우는 다른 학생들도 함께하는 학예회였다. 공연 아니고 학예회라고, 그러니까 기대하지 말고 오라고 빔은 몇 번이나 되짚어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미 신이 났다. 꼭 가서 사진을 찍어줘야지. 그 시간을 기록해서 예쁘게 선물해야지.




당일 금요일 7시 20분, 클래식류에 도착했다. 성수동 메쉬 커피 지하에 위치한 곳이었다. 메쉬 커피의 워크룸이자 클래식류가 사용하는 피아노도 함께 존재하는 곳. 생김새도, 높이도 다른 의자들이 줄지어 피아노를 향해 정렬되어 있었고, 우리는 맨 앞에 자리 잡았다. 구석진 곳에서 빔과 다른 분들이 학예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곡 순서들이 적힌 안내장을 받았고, 그곳에는 빔의 이름과 빔이 연주할 곡명도 함께 적혀 있었다. 내가 다 떨린다. 이름이 어딘가에 적힌다는 것은 역시 뭐든 많이 떨리는 일이다.





빔 이외의 학생들이 피아노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곡을 시작했다. 캐럴 위주의 밝고 신나는 선곡의 악보들이 피아노 위로 펼쳐졌다. 악보들이 펼쳐지자 종이 위로 표시된 많은 필기들이 보였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자인 악보 위로 빼곡한 노트들이 왠지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건반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마음이 새어 나온 것이겠지.



빔 차례가 와서 빔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주했다. 빔의 순서를 소개하면서 피아노 선생님은 빔에게 스윙 리듬이 있다고 했고, 첫 시간부터 스윙으로 피아노를 쳤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빔은 그날의 연주를 매우 훌륭하게 마쳤다. 신이 났다. 빔의 얇고 가는 손가락들이 제 음을 찾아갈 때마다 크리스마스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이런 것이구나.



캐럴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성수동에서 편집숍을 운영하는 사장님이거나, 성수동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거나, 또 성수동 카페의 바리스타이거나 아니면 그 카페에 자주 들리는 단골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 음악을 오래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같은 동네에 머문다는 이유로 모인 사람들이 이제 피아노를 처음 배우고,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고, 악보에 열심히 필기를 해가면서 건반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누른다. 손가락이 떨리고, 숨은 가쁘게 쉬면서.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멋들어진 공연장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연도 아니지만 그래도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한 곡 마치고 나서 그들이 짓는 뿌듯하고 홀가분한 표정이 얼마나 좋아 보였는지 모른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은 공연인 학예회가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선생님이 직접 준비하는 선물들이 따뜻하다. 학예회에 와서 각자 누구라고,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트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이런 시대에 이렇게 동네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이유로 연대한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얇은 끈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인 것이 왠지 감동스럽게 느껴지는 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추석의 방문 집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