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는 날
안 좋은 일은 꼭 겹쳐서 온다고 하던가. 오늘은 조금 힘든 날이었다. 지치는 날.
미팅이 있었다. 주택 프로젝트에 몇 번 참여를 하고 설계를 했었지만, 오늘 가져간 프로젝트 설계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공간이었다. 모형도 있었고,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건 나와 팀원, 대표까지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설계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반려당했다. 주택은 그렇다. 절대적 가치판단보다 개인의 경험과 취향이 프로젝트를 좌지우지한다. 아무리 건축가여도 건축주를 이길 수는 없다. 본인이 본인 돈 내고 지을 집. 그것도 평생 살 집이라고 하면 더욱. '아, 이게 주택이었지.' 하면서 미팅을 끝내고 나왔다. 말문은 몇 번이나 턱턱 막혔다.
내가 설계한 공간이어도, 결정은 나의 몫이 아니다. 나는 설계안이 반려당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렇구나' 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아쉬움은 짙게 남는다. 내가 좋아했고 살고 싶었던 계획안은 세상에 나타날 수 없게 됐다. 몇 명만 겨우 기억하다 또 금방 잊힐 것이다.
걱정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걱정은 현실이 되고 문제가 됐다. 미리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냥 지나치지 말걸. 소용없는 후회가 드는데, 후회를 막지도 못했다. 도망치고만 싶었는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오늘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입맛은 뚝 떨어졌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내가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방법을 딱히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됐다. 그저 동굴로 들어와서 튀어 오르는 불안과 무거운 마음을 견디면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그게 겨우 내가 가진 방법이었다.
시험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무언가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미미한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 나는 이 시험을 얼른 합격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고, 그러면 꼼짝없이 책상에 매여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게 또 역설적이게도 시험 준비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 자체가 내가 진행하고 있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이다.
실무에 쓰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건데, 투자하는 절대적 시간들은 또 내 실무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또 실무에선 자격증이 있었으면 좋겠고, 하지만 당장 진행하고 있는 일들에게서 어느 정도 시간을 빼놔야 공부할 시간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이 일 저 일 모두를 제대로 못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한 만큼 결과가 나오면 고민은 좀 더 줄어들 것 같은데, 시험이란 것이 또 꽤 운에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 내가 투자한 시간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을까 의심하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생각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도 자꾸 제자리를 뱅뱅 도는 사고 회로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 조금 생각이 정리될까 해서, 오랜만에 스스로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