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마른 공기와 차갑고 공허한 냄새로 기억되는 공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얇은 소음들과 웅웅 낮게 울리는 엔진 소리, 그리고 때로 먹먹해지는 고막. 왜인지 모르게 무채색으로 기억되는 그곳은 비행기 안이다.
난기류에 진입하며 흔들리는 기체와 이륙 시 강한 진동과 소음, 그리고 언제나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착륙 때문인지 비행기를 꺼려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나는 오히려 조금 즐기는 편에 가깝다. 이착륙과 난기류 사이, 나는 비어버린 것과 같은 시간에 주목한다. 특히 10시간이 넘어가는 비행을 할 때가 난 더 좋다.
최대한 편한 옷과 신발을 신고, 들고 온 가방은 의자 아래 밀어 넣고 벨트를 맨다. 하늘 위에선 추울 수도 있으니 담요 또는 가볍게 걸칠 수 있는 카디건 종류가 있으면 좋다. 오래 끼고 있어도 귀가 아프지 않은 이어폰도 꺼내 놓는다. 창가 자리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창가 자리가 좋은 것은 그저 몇 장의 사진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니까.
앞쪽 의자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비행경로와 남은 시간을 체크한다. 휴대폰은 꺼서 가방 속에 넣어두고, 읽을 책과 공책과 펜을 꺼내 둔다. 아무 방해도, 자극도 없는 10시간이라는 동안 나는 앞으로 도착할 여행지에서의 계획을 짜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영화를 볼 때도 있지만, 한 편 이상 본 적은 없다.
흔들림에 가끔 눈도 붙였다가, 승무원이 가져다주는 기내식도 먹는다. 무엇을 시키든 맛이 그리 다른 것 같지 않다. 향도 났었겠지만, 그리 인상 깊지는 않다. 향이 나려면 신라면 정도는 시켜먹어줘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강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을 때는 또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거의 먹는 일이 없다. 대신 와인은 몇 잔이고 시켜서 먹는 편이다.
대개 10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하려고 계획한 일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비행은 종료된다. 글을 잔뜩 쓰려고 했지만 목표한 만큼은 아닐 때가 많고, 책도 한 권 이상 읽으려고 두 세 권쯤 챙겨 오지만 그렇게까지 많이 읽지는 못한다. 여행 계획은 비행기 안에서 모조리 세우려고 했지만, 인터넷을 할 수 없다는 큰 난관에 부딪혀 결국 큰 틀만 잡은 채로 착륙한다. 하지만 어차피 비어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얼마큼 하든 해낸 것이다. 문밖을 나가면 여행지에 도착을 성공한 셈이니까.
비가 꽤 자주 내리는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우산도 챙겨야 하고, 신발도 골라 신어야 하는 불편한 날씨지만 한편, 나무들이 짙은 녹음으로 피어나는 계기이기도 하다. 유난히 봄비가 내리고 나면 강렬한 흙냄새가 거리를 채우고 빛나는 연두색으로 새잎이 올라온다. 많은 감각들이 갑작스레 몰려와 내 주위를 가득 채운다.
봄비로 인해 감각이 채워지는 경험이 가능한 것은 그간 있었던 춥고 건조한 겨울이 줄곧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 간 이어진 차가운 감각의 공백으로 인해 변화가 더 극명하게 느껴진다. 마치 겨울과 같이 비행기의 공허하고 건조한 시간들은 여행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감각을 비워두던 몇 시간의 비행 끝에 내려, 다른 기온과 습도와 빛과 향을 가진 낯선 공간으로 들어설 때가 있었다.
말이 길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어딘가에 쾅 부딪히듯 충격적으로 다른 감각이 나를 덮쳐오는 낯섦을 경험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아, 비행기 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