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동네를 새롭게 즐기는 법
"익숙한 동네를 새롭게 즐기는 법이 있나요?”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세계 빌리브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사진첩을 뒤지다 보니 문득 한강처럼 익숙하면서 갈 때마다 새로웠던 장소가 있을까 싶더라.
뜨거운 여름이다. 해는 맹렬하게 땅을 데우고, 땅은 후끈 달아오른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한여름. 올여름은 다른 여름들보다 더 뜨겁고, 더 오래갈 것이라며 뉴스에서는 연일 으름장을 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요 며칠 아침에 일어나 한강 너머가 또렷하게 보이는 모습을 보고 짐작한다.
오늘도 덥겠구나.
창 밖의 한강은 나에게 오늘의 날씨를 짐작하기 위한 창구이기도 하지만, 계절을 알게 하는 창이기도 했다. 봄이 올 때면 자주 창 밖을 살폈는데, 내가 방심한 틈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풍경을 놓칠까 봐서다. 여름이 오면 매미 소리와 함께 우거지고 울창한 벚꽃나무가 한강을 거의 가리듯이 자랐다. 더운 날일수록, 한강의 채도는 더욱 높아졌다. 반면 겨울에 얼어버린 한강 수면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이면 언제 색깔 같은 것을 가졌냐는 듯 온통 세상은 희게 변하곤 했다.
한강은 계절에 따라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날씨와 시간에 따라서도 다채로운 광경을 보여준다.
어느 날은 유독 한강의 잔디와 나무들이 다른 날들보다 더 초록색으로 빛났다. 생기를 가득 머금은 것처럼 풀냄새가 짙게 났다. 또 어느 날은 유난히 잔잔히 흐르는 한강의 수면이 건너편 건물들의 스카이라인을 그대로 비춰내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사진을 찍어 뒤집어도, 마치 똑바로 찍은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많은 것들이 움직이는 날이었다. 한강의 수면은 계속해서 흔들리며 그 어떤 것도 똑바로 비추지 않았고, 나뭇잎들의 흔들림은 살랑이는 날들도 있었지만 거칠게 요동치는 날들도 있었다. 장마로 며칠간 내내 비가 오는 날이면, 많은 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넓었던 잔디밭이 모두 수면 아래로 잠기고, 한강 건너편 건물들도 안개로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공간일 텐데도, 같은 풍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강의 계절과 색을 몇 장이고 찍어 기록하곤 한다. 사진첩에 남겨진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지만 사진을 찍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그저 내가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많은 일상의 기억들은 쉽게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곤 하는데, 사진을 찍은 그 순간은 조금 더 선명하게 남으니까.
익숙한 공간을 나는 다시금 걸으면서 일기를 써 내려가듯 눈에 담고 사진을 찍는다. 가장 쉽게 한강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공간을 꾸준히 바라보는 일은 변화를 눈치채는 일이기도 하다. 항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바라보며 깨닫게 된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지, 날씨 예보만으로는 쉬이 예측할 수 없다.
오래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층층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와 비슷하다. 멀리서 보면 그저 동그란 케이크일 뿐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켜켜이 다른 시간들의 기억들이 쌓여 있다. 누구에게라도 여러 기억들이 중첩된 공간이 있을 텐데 그것이 나에겐 한강이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강은 나의 하굣길이었다. 한강과 맞붙어 있던 고등학교에서 후문으로 나오면, 바로 한강 시민공원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가로질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엔 큰 놀이터가 있었고 또 꼬불꼬불한 갈대밭이 있어 가끔씩은 집을 지나쳐 한강을 한 바퀴 더 돌고선 돌아왔다.
대학교 때부턴 많은 이들이 그렇듯, 친구들과 돗자리 하나 가지고 한강으로 나섰다. 우리 한강 갈까? 그렇게 의기투합을 하고 나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한강으로 가 누웠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 노래도 꽤 크게 틀 수 있었다. 진지하고 어려운 이야기 대신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면서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괜히 옆 사람들은 무얼 먹나 구경하기도 했다. 아마 나는 떡볶이와 컵라면을 가장 자주 먹었던 것 같다.
한창 자전거에 취미를 붙였을 때에는 헬멧을 쓰고 시원한 물을 챙겨 한강으로 나섰다. 한강은 평지여서 자전거를 즐기는 데에 크게 힘이 들지 않아 좋았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 괜한 소속감도 느낄 수 있었으며, 적당한 거리마다 편의점이 있어 쉬기도 좋고 또 강을 건너면 같은 길을 두 번 지나칠 필요도 없었다.
별일 없이 한강을 찾기도 하지만, 한강에서는 여러 이벤트들도 열려 일부러 시간을 맞춰 찾아야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특히 불꽃놀이 축제가 열릴 때면, 낮부터 좋은 스폿을 찾아 자리를 잡고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서울에서 그만한 불꽃놀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장소는 아마도 한강이 유일하지 않을까.
그저 집에 가는 길목이었던 한강에서 시간이 흐르며 나는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됐다.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과 밥을 먹었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 멀리까지 라이딩을 나갔고, 한강에서 어떤 이벤트가 열린다고 하면 찾아가 하루 종일 기다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점점 더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갈대밭은 어느 순간 없어지고, X-게임장이 생겼는데 스케이트보드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묘기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어느새 가득 모여들었다. 한쪽에선 또 저녁에도 환하게 불을 켜고 암벽 등반을 하는 동호회 사람들을 발견했다. 드론을 띄우는 사람도 있었고, RC카를 운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마음대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스포츠카이트를 날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강시민공원에 마련된 농구장, 축구장, 그리고 족구장에서 땀 흘리며 뛰는 남자아이들이 있었고, 그 옆에는 또 유유히 배드민턴을 치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을 즐기기도 했으며, 또 바둑을 옹기종기 모여 두시는 곳도 따로 있었다. 날이 좋아지면 사람들은 하나둘 텐트를 가지고 한강으로 나왔다.
밤을 지새울 수는 없었으나, 낮부터 저녁까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캠핑 기분을 내기엔 충분했다. 텐트 사이사이로 산책을 나온 반려견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처음부터 한강이 이런 공간이었나 돌이켜보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가 지나며 지금의 한강은 많은 행위를 가능케 하는 공간이 됐다. 각자의 방법으로 한강에서 휴식을 취하고, 취미를 가진다. 같은 공간에서 사람들마다 다른 모습으로 한강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꽤 유쾌한 기분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한강은 새로운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이 선선해지면, 한강에 테니스를 배우러 갈 예정이다. 그러면 나도 새로운 한강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일상이란 것은 마치 쳇바퀴와 다를 것이 없어서, 학교와 집 혹은 회사와 집을 오고 가는 생활에 때로는 지겨워지고, 지루해지다가 지쳐버리기도 한다. 같은 일의 끊임없는 반복이 쉬운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신발끈을 질끈 묶고 산책을 나갈 수 있는 장소이자 부담 없이 오래 머물며 풍경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우리의 삶에 조금의 여유는 더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꼭 한강이 아니더라도, 도시 안에 공원처럼 널찍한 빈 공간은 꼭 필요하다. 멀리 볼 수 있고, 넓은 하늘을 가득 눈에 담을 수 있는 땅.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장소. 누군가에게 그것은 뒷산 꼭대기의 정자가 될 수도 있고, 어렸을 적부터 살던 동네의 놀이터가 될 수도 있겠고, 또 학창 시절을 보낸 학교 운동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장소가 나에게는 한강이다.
한강을 걷는 발아래, 내가 지나쳐온 한강에서의 추억이 묻혀있다.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대부분 즐거운 기억들이라, 한강을 찾을 때마다 찾아내는 기억의 조각들이 일상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요즘처럼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없을 때면, 즐거웠던 때를 잊지 않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된다. 희망 같은 것이 생기니까.
우리가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이렇듯 불볕더위가 물러나고 마스크를 벗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으면, 그때엔 또 한강에 오고 싶다. 맛있는 것들을 또 양손 가득 들고서, 블루투스 스피커는 꼭 챙기고 돗자리는 크면 클수록 좋다. 이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한강에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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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신세계건설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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