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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Nov 01. 2021

여름날의 페스티벌을 떠올리게 하는

<맥주>


페스티벌에 가면 나무 아래 그늘 진 자리에 돗자리부터 펼쳐야 했다. 처음 페스티벌에 갔던 해엔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신나게 자리를 잡았다가, 말 그대로 타 죽는 줄 알았다. 가을인 줄 알았던 페스티벌의 나날들은 대부분 늦여름이었고, 해가 떠 있는 시간엔 각자의 방식으로 더위를 피했다. 페스티벌에 익숙한 고수들은 입장하자마자 곧바로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돗자리와 의자, 테이블과 같은 용품들을 펼쳐놨다. 경험자들이었다.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나면, 곧바로 친구들과 맥주 부스로 향했다. 푸드 존에는 어떤 음식이 들어왔나 살피기 전에 일단 먼저 페스티벌에 성공적으로 입성했음을 축하하러, 아니 그냥 날이 좋으니까, 아니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자는,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이유도 필요 없이 신나니까 한 잔을 해야겠다는 것이 우리들이 곧장 맥주를 받으러 맥주 부스로 향하는 이유였다. 맥주 한 잔씩 받아 들고 잔디밭 위에 서서 짠을 외쳤다. 맥주엔 거품이 보슬보슬하게 쌓여 있었고, 햇빛 아래서 먹는 맥주는 왠지 오렌지 빛으로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날도 덥겠다, 맥주를 마시기엔 딱 좋은 날씨였을 수도 있다.



맥주는 매년 페스티벌마다 다른 브랜드들이 들어왔다. 이미 페스티벌에 가기로 했으므로,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겨우 한 병씩 들고 들어갈 수 있는 유리병에 맥주를 담아갈 수도 없었으니, 맛있는 맥주 브랜드가 들어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어떤 해에는 에델바이스 맥주가 들어와서, 그 해의 페스티벌은 달콤하고 가벼운 과일 향으로 기억되었다. 어떤 페스티벌에는 칭타오가 들어와서, 그렇게 칭타오를 연속으로 마셔본 것도 또 처음이었다. 지산 락페스티벌에 갔던 해에는 카스가 있었다. 어떻게 맥주가 카스 딱 하나 들어와 있을 수 있냐고 나와 친구들은 꽤 불만스러워했는데, 불평하는 것치고는 맥주를 많이 사 먹었다. 500ml와 1L의 용량을 나눠서 팔았는데, 계속 줄을 서서 사 먹는 게 귀찮으니 1L짜리 큰 잔을 품에 안고서 공연을 봤다. 지코가 왔었고, 지코의 랩을 따라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아마 맥주는 조금 흘렀을 수도 있다.




오감 중 향기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하던가. 페스티벌은 꽤 많은 부분 맥주로 기억되었다. 페스티벌에서 만난 가수들의 음악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들을 때도, 맥주의 향과 빛이 떠올랐다. 아주 더웠던 페스티벌에서 목을 축이려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느꼈던 자글자글한 탄산과 친구들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신나게 짠을 한 기억은 음악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유로웠고, 서로의 행복은 맥주 덕분인지 매우 쉽게 전해졌다.


올해도 작년처럼 또 많은 페스티벌들이 기획되었다 모두 취소되었다. 이제 취소 공지를 받는 것도 반복되니 실망은커녕 그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다. 인터파크에서 예약했던 금액이 환불되어 돌아오고, 달력에 써놨던 페스티벌의 이름도 쓱쓱 지워버리는 것이 익숙할 지경이다. 그 와중에 11월 초, 한 번 미뤄졌던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만이 살아남아 개최될 예정이다. 나는 자라섬에서 맥주를 들이켤 수 있을까. 왠지 그것이 어떤 맥주든, 조금은 감격스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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