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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Nov 01. 2021

고래의 기분

<맥주>

 나는 술을 가려 마시지도 않고 선택 장애도 있지만 누가 어떤 술이 마시고 싶느냐 물으면 곧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날엔 소주, 그다음 날은 와인, 또 다른 날은 고량주 같은 술들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은 꽤 확고히 자리잡기 때문에 술을 먼저 고른 다음 식당을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술들은 아무래도 밥보다는 술을 마시고 싶은 날, 한두 병만으로도 흥건하게 마시고 진탕 취할 수 있는 술들이다. 여럿이서보다는 두서명이서 또는 혼자 마시는 게 좋은 술.


 그렇게 도란도란 마시는 술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평생 한 가지 술만 마시고 살아야 한다면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맥주를 선택할 거다. 맛의 종류가 다양해서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마시기도 좋고, 낮이건 밤이건 어느 음식과 먹어도 어울리고, 도수도 높지 않아 우당탕 잔뜩 마시기에도 좋다. 이 맥주를 마시다 저 맥주를 마셔도 결국 다 맥주여서 다음 날 숙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점도 좋다.


 캔맥주 하나를 톡 까서 컵에 졸졸 따르며 생각한다. 지금까지 마셨던 맥주를 다 합치면 양이 얼마나 될까. 일주일에 큰 캔으로 두어 개. 그렇게 일 리터씩 마신다고 하면, 물론 그것보다는 더 많이 많이 마셨던 것 같긴 하지만, 주 오일로 따졌을 때 한 달에 20리터. 일 년이면 240리터쯤이고 거기다가 구 년을 곱하면 2,160리터다. 작은 수영장 한 개 정도는 거뜬히 해치우지 않았나 싶다. 맥주가 가득 찬 수영장이 있다면 당장에 뛰어들고 싶네.


 맥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역시 첫 모금이다. 거품이 가득한 차가운 맥주를 한가득 입에 물고 꿀꺽 삼킬 때, 탄산이 목을 따끔따끔하게 할 때 나는 고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입 안에 가득 넣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고래. 고래의 입은 커다랗지만 목구멍은 아주 작다고 하니까 삼킬 때에는 얼추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본 적도 없는 고래와의 접점을 맥주에서 찾는다. 그렇게 맥주의 시원하고 따끔거리는 기분을 좋아하는 터라 나는 보통 라거 맥주를 마신다. 에일 맥주는 향이 좋지만, 향에 정신이 팔려 맥주가 주는 따끔거림에 집중하기 어려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꿀꺽꿀꺽 들이키기보다는 홀짝거려야만 할 것 같다.


 맥주가 특히 더 맛있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뭔가를 끝마치며 마시는 맥주가 그렇다. 운동이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서, 퇴근을 하고, 자기 전, 학원이 끝나고 난 다음이라든지 하는 순간. 집중하느라 따끈하게 데워진 머리와 몸을 착 가라앉히고 끌어내리는 맥주 한 캔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건, 많은 게 괜찮아지고 스스로가 나쁘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된다. 간단하고 단짠단짠한 주전부리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한 입에 맥주 한 모금, 또 한 입에 맥주 두 모금. 맥주가 음식을 빛나게 하고, 또 맥주 없이는 분위기의 맛이 살지 않는다. 어디에나 어울리는 맥주 같은 사람. 자유롭고 편안한 맥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 한편으로 생각한다.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최근 들어 맥주를 마시면 콧물과 재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잠들었다가 콧등과 이마가 아파 잠에서 깨는 밤도 생겼다. 좋아하는 만큼 상처도 크다고, 꿀꺽꿀꺽 들이켜야 할 맥주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다니 슬프기 그지없지만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늦게까지 맥주를 잔뜩 마실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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