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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킴 Nov 01. 2021

탄산과 알콜 사이의 애매함,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맥주>

나는 술도 좋아하고 탄산도 좋아한다. 하지만 맥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이면서 탄산이기도 한 대표적인 음료인데 말이다. 술을 마시려면 소주를 마시고, 탄산을 마시려면 콜라를 마신다. 맥주는 내 보기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가 땡길때가 있다. 약간은 나른하게 취하고 싶지만 흐트러지고 싶지는 않을 때, 짜릿한 탄산이 먹고 싶지만 달달함보다는 씁쓸함을 먼저 맛보고 싶을 때. 애매하게 취하고 애매하게 짜릿하고 싶을 때. 살다보면 이런 애매한 순간들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탄산으로서의 맥주


역시 맥주 생각이 가장 많이 날 때는 여름이다. 무더운 여름날, 흐르는 땀이 채 식기도 전에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그러면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잔에 맥주가 가득 담겨 나온다.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탄산이 목구멍을 따라 넘어가며 따끔따끔, 짜릿짜릿하다. 끝에 남는 씁쓸함이 제법 괜찮다. 달았다면 과했을텐데, 씁쓸해서 적당하다.


더워서인지 잔의 표면에는 벌써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땀도 제법 식었고, 해가 지고 나면 더위는 한 풀 꺾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여름밤에 들이키는 따끔한 보리맛 탄산은 마치 제철음식처럼 딱 적당하다.



알콜로서의 맥주


일이 많았고, 야근을 했다. 저녁을 먹지 못했기에 집으로 돌아오니 배가 고팠다. 이미 시간은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 끼 식사를 하기엔 어찌 좀 과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니 너무 배가 고프다. 그리고 무엇보다 쌓여둔 감정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맥주를 택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좋아하는 감자칩을 하나 사고, 집으로 돌아와 맥주캔을 딴다. 감자칩 한 입, 맥주 한 모금. 배도 고프고 짜증도 나고. 그러다보면 맥주를 마시는 속도가 제법 빨라진다. 30분도 되지 않아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온다. 행동이 느릿해지고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 몸을 감싼다.


아직 쌓인 일은 많고, 눈을 뜨고 다시 회사를 가면 그 몫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지만, 그래도 맥주 한 캔 마시니 그 일이 그렇게 무겁게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집에서 혼자 술에 취해 흐트러지는 건 너무 별로니까 오늘은 딱 이만큼만 늘어지기로 한다. 알콜로서의 맥주 한 캔은 딱 그만큼을 허락해준다.



다시 맥주와 함께 할 순간


나에게 맥주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이렇게 애매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탄산으로서의 맥주도, 알콜로서의 맥주도 아닌, 맥주 그 자체로 어울리는 순간들이 있다. 내겐 야구장에서의 맥주가 그렇다. 11월의 첫날, 코로나와의 관계가 변화를 맞았다. 그리고 야구장에 다시, 맥주가 찾아왔다. 직관을 하며 맥주를 마시기엔 손이 시려울 수도 있는 날씨지만, 마치 고유명사 같은 '야구장 맥주'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


내년 봄엔 애매하게 취하고 애매하게 짜릿해도 좋으니, 경기장에 있는 내 손에 맥주가 함께 들려있었으면 좋겠다. 애매한 순간에 찾는 맥주가 아니라, 화룡점정을 담당하는 맥주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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