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아키 Dec 15. 2021

공간엔 시대가 묻어난다

웻에버

파사드, 길과 마주한 건물의 얼굴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통해 많은 것들을 읽어낸다. 물론 눈코입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안경이나 헤어스타일 아니면 메이크업과 같은 요소는 시대와 문화를 짙게 보여준다. 또한 스타일은 그 사람의 성격과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요소이기도해서, 겉모습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람이 순하고 착하거나 아니면 예민하거나 고집이 셀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건축에도 얼굴이 있다. 건축의 얼굴은 파사드(facade)라고 부르고, 파사드는 사람의 얼굴처럼 건축의 시대와 성격을 가늠케 한다. 부산 광안리 해변 근처의 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웻에버도 그러했다.



옛 한국의 주택이라 하면 이름 석자가 적힌 현판이 한편에 달려 있는 대문이 있고, 그 뒤로 장독대와 같은 살림살이가 있는 마당이 있고, 마당을 지나쳐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마당은 한국의 주택에선 빼놓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고, 2층과 반지하층에 다른 세대가 살았어도 대문과 마당의 구조는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그런데 7, 80년대를 지나며 어떤 집들은 마당이 없이 지어지기도 했다. 당시 도심에 우후죽순 지어지던 상가주택들은 최소한의 공용공간으로 지어지기 위해 많은 공간들을 생략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턴 현관문이 도로를 마주하는 건물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계단실을 만드는 것조차 아까워서, 웻에버가 자리한 건물처럼 1층 입구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란히 자리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건물의 구조는 우연찮게 한국의 전형적인 주택의 구조와 벗어나며 도로와 만나는 건물의 얼굴을 중요시하던 유럽 건축물이 떠오른다. 길과 정면으로 마주한 파사드는 더 이상 마당도 없고, 건물 전체의 입구로 쓰이는 계단실도 없어서 오히려 건축의 입면이 가지고 있는 외장의 패턴이나 창호의 모습, 아니면 벽에 달린 조명과 현관문의 소재와 모양이 눈에 띈다.


웻에버가 자리한 건물의 얼굴에는 두 개의 목문이 자리한다. 하나는 1층으로 진입하는 문, 그리고 다른 하나는 2층부터 시작되는 웻에버로 들어가는 문이다. 웻에버의 대문을 열면 곧바로 나무로 짜인 계단이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전 시대의 다른 나라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공간엔 시대가 묻어난다


공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아니지만, 공간의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게 한 영화가 있었다. 1960년대, 80년대, 그리고 2010년대 같은 집을 거쳐 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와이 우먼 킬>은 같은 집 안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시대를 넘나들며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 같은 구조를 가진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마감재와 조명을 달고 어떤 가구를 들여놓았는지에 따라 집은 마치 같은 건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배경만 보여줘도, 어떤 시대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이 나올지 다음 장면을 예상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공간이 시대를 담아 보여줬던 것이다.



2층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웻에버의 거실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웻에버는 밝고 화사하고 세련된 숙소라고 명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웻에버는 몇십 년 전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고, 심지어 한국인 것 같지도 않다. 이곳은 가본 적도 없는 미국 동부의 어느 항구도시에 있는, 문을 열면 바로 비릿한 바다 향이 느껴질 것만 같은 축축하고 어두운 공간이다.



오래된 헤링본 패턴의 나무 마룻바닥과 노출된 콘크리트 천장, 벽을 감싼 푸른 벽지와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 몰딩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배경이다. 노란 장판, 꽃무늬 벽지와 체리색 몰딩으로 통칭되곤 하는 한국의 집 인테리어와 달리 이곳은 짙은 색상의 마감재를 쓰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만날 수 있는 두 개의 침실에서는 유럽의 어느 가정집에서나 쓰일 것 같은 꽃무늬 벽지와 함께 타일 바닥을 깔았다. 불그스름한 타일은 그 자체로 울퉁불퉁한 표면 때문에 일반적인 한국의 가정집에서는 쉬이 선택하기 어려운 종류의 마감재였다.





커다랗고 밝은 네모난 방등 대신 2층 거실과 주방 천장에는 펜던트 조명을 내렸다. 밝지는 않더라도, 생활하기 충분한 조도를 내었다. 3층에 있는 침실에는 천장에 조명을 아예 달지 않았다. 방 한편에 놓인 스탠드 조명으로도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인 침실에서는 무리가 없었다. 천장에 등이 없이 스탠드 조명과 펜던트 혹은 벽등을 사용해 공간을 밝히는 것도 한국과는 다른 문화였기 때문에 문화적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독한 컨셉, 끈기와 집념 사이


공간은 오직 바닥, 벽, 그리고 천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배경일뿐이니 공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사람이 사용하는 그들의 물건일 것이다. 웻에버는 끝까지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웻에버는 지독한 컨셉 안에서 움직인다. 실제로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되돌아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지 치밀하게 상상하고 구현한다.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정말 옛 가구를 들여놓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공간을 채우는 가구들은 물론 문의 손잡이 하나, 스위치와 조명, 옷걸이까지도 모두 오랜 고민 끝에 데려와 비치했을 것이다. 나아가 벽에 걸린 포스터들과 침실 벽장에 꽂혀 있는 그림과 책들, 거실에서 한쪽 장을 모두 채운 LP들은 웻에버에서 머무는 하룻밤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3층의 계단을 따라 한 층을 더 올라가면, 옥상이 나오고 옥탑방처럼 생긴 곳의 문을 열면 누군가의 작업실을 만나볼 수 있다. 마치 누군가가 작업실에 그림을 그리다가 막 떠난 것처럼 수십 점의 그림들이 이곳의 면면을 채우고 있는데, 웻에버의 공간과 어우러지며 생동감이 물씬 느껴진다. 보면 안 될 누군가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온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보았다. 웻에버의 옥탑방은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진행되는 곳으로, 현재는 일러스트레이터의 드로잉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 여행을 통해 낯선 누군가의 집에 동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과연 이럴까. 웻에버는 공간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떨 것 같냐고, 굳이 소리 내어 묻지 않아도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보여준 것이다. 공간에는 시대가 묻어난다고.





리바트 웹진 <힌지> 에 실린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hyundailivart.co.kr/community/magazine/B200038181?typeCd=00002&sortBy=rgstdtime


매거진의 이전글 충분히 숙성되어야 좋은 맛을 내는 술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