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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Feb 13. 2022

수채화 같은 디자인

4560 designhaus


초등학교 때 오래 미술학원을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학원이라기보다 화실에 더 가까웠다. 학교 미술시간에 주어진 숙제나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고, 다만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면 그다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음 그림은 다시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흰 도화지를 채우는 일이었다.


수채화는 가장 자주 그렸지만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울 수도 없고, 덧칠할 수도 없었다. 물감이 너무 많이 섞이면 색은 금방 탁하게 변해버려 다시 맑은 색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지우려고 붓으로 여러 번 문지르기 시작하면 금방 도화지가 울어버렸다.


수채화의 과정 중에 U턴 같은 건 선택지에 없었다. 오로지 직진. 지나온 길은 온전히 인정해야 했다. 한 번의 결정과 선택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수채화는 가장 어려운 동시에 투명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 군더더기 없이 표현한다. 그건 마치 디터 람스의 디자인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모더니즘의 시대가 그러했을 것이다. 아니면 몇 명의 사람들이 시대를 이끌어 갔던 것일까. 장식은 죄악이라고, 더 적을수록 더 좋은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더 간단하고 간략하게 모든 것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벌써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최소한의 형태와 구성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4560 디자인하우스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미니멀리즘 제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곳으로, 디터 람스의 브라운 제품들과 애플 초기 제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장품들을 공개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양재동에 둥지를 튼 4560 디자인하우스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긴 스테인리스 벤치들이 줄지어 자리한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앞으로 내부에서 만나게 될 디자인 제품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로비 역할을 하는 카페와 벤치에는 디자인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단순한 직육면체들로 기능하는 커피 바와 벤치들은 디자인 제품들을 위해 한 켠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미니멀리즘에 가장 걸맞은 자세이기도 하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에 참여했던 제품들이나 혹은 애플에서 내놓은 제품들 모두 가전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전시장 또한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구성으로 공간이 짜였다. 사람보다 훨씬 큰 작품이 들어온다던지, 사진이나 그림처럼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관람해야 하는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손에 쥐어져 쓰였던 가구와 가전을 보는 장소라 방의 형태가 가장 자연스럽다.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며 그곳은 거실이기도 했고, 누군가(아마도 디터 람스)의 작업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라디오와 다이얼을 돌려야 하는 전화기 그리고 둥근 화면을 가진 브라운관 TV가 아니었다면 세월의 간극을 쉬이 느끼지 못할 만큼 디자인들은 여전히 현대적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많이 보면서 살아간다. 시각적으로 괴로운 데에 익숙해져 버리기도 한다. 건물의 외관을 가득 채운 간판들과 창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각종 학원과 병원들의 글자들이 도시를 점령하듯 위압적으로 굴 때, 누가 누가 더 요란한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각종 지자체의 동상들을 볼 때,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놨지만 정작 욕망밖에 보이지 않는 부동산 홍보물을 받아볼 때. 그럴 때 4560 디자인하우스로 도망치고 싶어 진다. 나를 괴롭히는 온갖 불편한 것들로부터,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소거하고 딱 한 가지 철학만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Less but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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