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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May 25. 2022

인왕산 숲속에 숨겨진 보물

인왕산숲속쉼터

인왕제색도


서울에게 인왕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난 4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마주하고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751년,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의 인왕산이 담긴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서울을 지키는 산자락의 모습은 여전했다. 범바위도, 코끼리바위와 치마바위 그리고 서울을 감싸고 있는 성곽까지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림의 왼쪽 중심 즈음에 대각선의 흰 물줄기가 표현된 부분은 지금의 수성동 계곡으로, 인왕산 숲속쉼터를 향하며 지나치게 될 장소이기도 했다.




여전히 숨겨진 ‘인왕3분초’


서울을 지키는 성곽에 사람이 머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외부의 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미리 알아차려야 할 테니까. 그리고 서울을 지키는 자들의 이러한 임무는 조선시대를 지나서 현대에까지 이어졌던 모양이다. 1968년 북한의 청와대 기습 시도 이후 인왕산과 북한산에 걸쳐 30여 개의 군 초소가 생겨났고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됐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8년,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20개의 초소 중 18개를 철거하고 두 곳은 보존하기로 했다. ‘인왕3분초’라 불리던 인왕산 숲속쉼터는 그 두 곳 중 하나이다.


버스 종점인 수성동 계곡 앞에 내려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걸으면 금방 인왕산 숲속쉼터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곳이 군 시설로 쓰이던 곳이라는 사실은 꽤 나중에야 떠올렸다. 겉옷을 벗어 들고, 크게 숨을 내쉬며 때로는 가파른 경사에 나뭇가지들을 잡고서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인왕산 숲속쉼터는 울창한 나무 사이 숨겨져 있다. 조금만 산길을 따라 오르거나 내려가면 곧 보이지 않게 된다. 거창한 마중과 떠들썩한 배웅 없이 그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곧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만다. 오래도록 군 내무반으로 쓰이며 숨겨져 있던 곳이니, 이렇듯 여전히 몸을 낮추고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 자리가 제 자리인 것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좁은 산길을 걷다 마주치는 유리에 비친 나무 그림자와 반사되는 빛들이 퍽 반갑다. 아무도 모르는 숲속의 보물을 발견한 듯.



역사와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곳 인왕산의 자그마한 쉼터는 건물을 떠받치고 있던 철근콘크리트의 기초와 필로티 기둥만을 남긴 채 상부 구조물들은 모두 철거했다. 생활을 위해 지어졌던 건물을 무리하게 쉼터로 고쳐 쓰는 것보다, 쉼터에 걸맞은 좋은 건물을 지어 올리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새롭게 지어진 인왕산 숲속쉼터에는 목구조가 사용됐다. 이곳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여러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로가 없는 산중의 건축은 쉽지 않다. 많은 인력과 자재가 필요한 철근콘크리트의 구조보다는 운반이 수월하고 체결이 쉽고 간편한 목구조가 조금 더 효율적인 답처럼 느껴진다. 미리 재단해 온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 기둥끼리 엮는 보를 설치하여 공간을 만들어나갔다. 기능을 위해 선택된 목구조가 아이러니하게도 숲속의 쉼터를 더욱 숲과 동화되게 만들었다.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세우고 벽은 막지 않았다. 앞, 뒤, 양옆 모두 커튼월(curtain wall) 유리를 설치해 시야를 확보했다. 목적은 명백하다. 숲의 풍경이 내부로 완벽히 스며들고 또한 외부에서도 최대한 반사되는 풍경에 가려 숨기를 원했을 것이니, 통창인 유리가 가진 힘은 분명했다.



인왕산 숲속쉼터로 향하는 진입로의 바닥과 계단, 난간과 지붕은 모두 한 가지 알루미늄 그레이팅을 사용했다. 똑똑하게 재료를 선정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알루미늄 그레이팅은 건물의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을 것이고, 사람들이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의 질감을 가졌으며 또한 그레이팅이 가진 틈 사이로 물이 흘러 계단과 진입로엔 물이 고이지 않을 것이다.




고요히, 고스란히 바라보는 풍경


숲속쉼터로 들어가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전면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하늘이다. 공간의 방향은 서울을 향한다. 창문에 바짝 붙으면 저 아래 도심의 모습이 빼꼼 보이고, 멀리로는 북한산의 산세가 펼쳐진다. 오직 나무로 이뤄진 내부의 공간은 오히려 외부의 숲속 풍경이 실내로 깊게 들어오도록 해 시선을 빼앗지 않는다.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큰 나무 책상에 홀리듯 앉아 바깥을 바라보게 된다. 누구든 그렇다.



카페와 같은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인왕산 숲속쉼터는 오히려 도서관의 분위기에 더 가까웠다.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바깥을 바라봤다. 마치 숲을 열람하는 것과 같이 책을 넘기는 소리와 쉼터를 거니는 누군가의 발소리만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 누구도 하하 호호 웃거나 떠들고 웃지 않았다. 고요한 쉼을 바라고 있는 이 공간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경복궁 근처를 방문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치 도시를 굽어보는 것과 같은 바위산, 인왕산을 보게 된다. 인왕산은 서울이 가지는 당연한 풍경이어서 지금껏 무뎌져 있었는데, 이제는 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는 조용하고 단정한 어떤 쉼터를 떠올리게 됐다. 여러 사람이 그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쉬어가는 풍경을 상상하며 왠지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를 경계하고 무엇인가와 대립하기 위해 존재했던 공간이 이제는 도시의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터가 되었다는 사실에 괜스레 내가 다 뿌듯한 미소를 짓게 된다.




월간 샘터 2022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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