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여름이 찾아온 날
5월 달부터 수영을 시작했으니, 이제 꼬박 두 달이 되었다. 그 사이 나에겐 루틴이 생겼다. 오전 8시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선 7시 20분에는 잠에서 깨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수영장에서는 코로나 이후로 그렇게 된 것인지, 수건을 주지 않으니 꼭 개인 수건을 지참해야 한다.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고 가거나 아니면 가끔씩 아빠 차를 끌고 나가 수영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개인락커를 배정받아 사용하고 있으며, 락커 열쇠를 잃어버릴까 봐 지갑에 묶어뒀다. 지갑 잃어버리면 여러모로 큰일이다.
수영은 많은 칼로리를 소비하는 격한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수영장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들이 많이 계시다. 나는 그 와중에 정말 어린 편인데, 커다란 오리발을 한쪽 팔에 익숙하게 끼고 수영장으로 향하는 옆 레인(말하자면 고급 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선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확실히 연륜은 수영장에서 무시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듣는 수업은 8시 반이라서 직장인들도 좀 있는 편인데, 9시 반쯤 씻고 나와 10시 수업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분들을 보면 나이대가 정말 다르다. 언젠가 할머니가 된 내가 옹기종기 친구들과 모여 수영장 벤치에서 기다리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쩌다 우리나라 할머니들은 모두 뽀글 머리의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게 되었을까? 오늘 든 생각.
투명한 물 안경을 샀다. 까맣고 반사가 되는 재질의 물안경은 야외에서 쓰는 용이라, 자꾸만 물밖에서 선생님 말씀을 듣거나 시범을 볼 때에는 물 안경을 자주 벗었다가 다시 쓸 때면 물 자국과 습기를 지우기 위해 물에 한 번 헹궈야 했다. 실내에서 불필요하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기분이 들어 투명한 렌즈의 물 안경을 새로 사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김도 안 끼고 수영장이 밝아졌다. 멀리 잘 보인다. 그게 기분 좋아서 수영장에 가기 위해 일어날 때부터 한층 신이 난다. 장비란! 이제 오리발도 사고 싶다.
계속해서 30도를 유지하던 수온이 오늘은 28도로 내려가 있었다. 바깥이 후덥지근하고 축축해서 나는 시원하다고 느꼈는데, 선생님은 춥다면서 선수 시절 연습하던 수영장 온도라고 했다. 선생님은 물에 들어올 때마다 몸을 웅크리고 차가워하는데, 반면 나는 날이 습하고 더워지니 아침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수영장 물은 항상 시원하니까.
더불어 락커실에도 에어컨을 틀기 시작했다. 수영 레슨이 끝나서 샤워실을 지나 락커실에 와서도 몸에 남아 있는 열이 올라와 로션을 바를 때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덥지 않아도 한창 움직였던 근육들이 열을 내는 것이다. 이게 퍽 불편하다. 에어컨의 바람을 느끼곤 천장을 살펴보니 락커실에는 1-way 천장형 에어컨이 세 대나 달려있었다. 이게 뭐라고 매우 기뻤다.
6개월에 한 번씩, 반 선생님들이 모두 다 바뀐다고 했다. 7월부터는 나의 반이었던 두 번째 레인으로 새로운 선생님이 오신다고 했다. 첫 번째 레인에서는 세 명이 두 번째 레인으로 올라온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레인에서도 세 명이 차출되어 옆 레인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내가 포함됐다.
레인을 옮긴다는 것이 퍽 기쁘지 않은 것은 옆 레인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레인에서 우리 반이 옹기종기 모여 수영의 이론이나 팔과 다리의 자세 같은 것을 선생님의 말씀과 시범을 통해 배울 때, 옆 레인은 50분 동안 도무지 쉬질 않기 때문이다. 난 레인을 옮겨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업이 50분에 끝나고 다음 반 사람들이 정각에 수영장에 들어오기 전, 10분의 시간 동안 잠깐의 자유 수영을 즐길 수 있다. 그날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거나, 전에 배웠던 영법을 잊지 않기 위해 연습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출근이 급하지 않을 때면, 10분 정도 물속에 남아 몇 바퀴를 더 돌고 샤워장으로 향한다.
다시 수영을 시작하던 날, 숨을 쉬지 않고 25m 반대쪽까지 갈 수 있나 고개를 처박고 자유형으로 헤엄쳤다. 2년 전에는 분명 무리하지 않고도 가능했던 거리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는 14m 가서 죽는 줄 알았다. 팔다리가 쫙쫙 당겨지며 폐가 강하게 압박되며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란. 형편없이 줄어든 거리에 조금 속이 상했다.
그런데 오늘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숨 쉬지 않고 25m를 헤엄쳐 반대편 벽을 터치했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몸에 힘을 빼고 앞으로 나아간 것이 효과가 있었나 싶다. 나 혼자만의 기록인데 오늘은 왠지 기념비적인 날이었달까.
수영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마주칠 때면, 물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마치 혈액형이나 MBTI처럼 겉으로 봐서는 전혀 구분할 수 없지만 평생에 걸쳐 변하지 않는 본인의 특징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인이 되기까지 쉽게 변치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수(水)속성의 인간과 수속성이 아닌 인간.
수영장에 올 때 레인에서 또는 샤워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수속성일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혼자 웃을 때가 있다. 물이 싫다면 굳이 수영이라는 스포츠를 선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왠지 모를 동료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