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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ug 02. 2022

콘크리트의 둥근 호가 이끄는 방향

스페이스K

몇 년 간 논현동과 대치동, 삼성동을 옮겨가며 직장 생활을 했는데 점심시간마다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곤 목적지 없이 대로 안쪽의 골목들을 서성였다. 골목 안쪽엔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의 필로티 주차장들이 입을 벌리고 있거나, 퇴근 후의 직장인들을 낚아 챌 식당과 술집들의 불 꺼진 간판들이 어깨를 부딪혀가며 건물에 매달려 있었다. 직장 동료들과 근방에 작은 공원이나 놀이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지도 앱을 켜고 초록색으로 표시된 녹지가 있나 살폈지만, 주변엔 모두 수많은 이름을 가졌으나 익명과 다름없는 건물들뿐이었다.

     

빽빽하게 들어 찬 서울의 구도심과 달리 김포 공항 근처의 신도시인 마곡은 대규모의 업무 단지로서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필수적인 녹지 공간을 잃지 않았다. 한강에서부터 이어지는 습지생태공원과 서울식물원을 거쳐 올해 완공 예정인 LG아트센터가 마곡의 거대한 녹지 축을 이룬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녹지 축에서부터 뻗어 나온 작은 공원들과 산책길이 커다란 건물들 사이로 지나고 있다. 그 중 코오롱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인 스페이스K는 마곡의 크고 네모난 건물들 사이, 한다리 문화공원의 한 켠에 위치한다.




둥근 호가 이끄는 방향

   

어렸을 적 학교가 끝나면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기 위해 친구들과 물을 길어와 모래를 적셨다. 젖은 모래가 뭉쳐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두꺼비집을 만들었다.


주먹을 꽉 쥔 왼손을 바닥에 놓고 손등 위로 둥그렇게 모래를 모아 올려 단단하게 다져지도록 두드린다. 모래가 벽과 지붕이 되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두드리다가 둥근 모래 무덤이 손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 조심스레 손을 빼낸다. 손을 빼낸 자리는 둥근 호를 가진 문이 되고, 손이 들어 있던 공간은 집이 된다. 두꺼비집 하나를 만들고 나면 주변에 둥근 두꺼비집의 모양에 어울리는 곡선의 길을 냈다. 휘어지는 길들은 상상 속의 작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기도 했고 물이 흐르는 강이기도 했다.



스페이스K는 단단한 콘크리트로 지어졌지만, 언뜻 아주 어렸을 적 만들었던 두꺼비집을 생각나게 했다. 공원의 가장자리에 누군가가 공들여 두드려 놓은 것처럼 콘크리트 외벽은 날카롭지 않았고 둥그런 형태 때문인지 콘크리트 특유의 단단함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둥글게 휘어진 콘크리트 벽이 들어 올려져 입구를 만들어 냈고 푹 들어간 입구는 마치 왼손이 빠져나온 두꺼비집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에 더해 외벽의 라인을 따라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자연스레 비와 햇빛을 막는 입구의 캐노피 역할을 하면서 스페이스K는 화려한 치장 없이 조용하고 나지막한 외관을 가지게 됐다. 어떤 면에서는 흙을 빚어 만든 도자기 같기도 했는데, 특히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 길은 마치 조각칼로 예리하게 파내어 틈을 만들어 낸 것처럼 유려했다.



미끈한 회색의 외벽이 공원 안에 있는 다른 완만한 언덕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사방이 열린 공원에서 사람들은 언덕과 콘크리트의 둥근 호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언제라도 스페이스K에 들러 전시를 볼 수 있을 만큼 미술관은 공원을 지나는 사람들과 가까웠고, 원한다면 스페이스K의 좁고 기다란 틈을 통해 옥상으로도 오를 수 있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 그늘에서 해를 피하며 잠깐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떠있는 두꺼운 콘크리트 천장은 텐트 안쪽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아늑함을 주기도 했다.




기둥을 없애면 나타나는 가능성

  


스페이스K의 유리문을 통과해 가볍게 구획된 매표소를 지나고 나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으로 들어오게 된다. 약 200평의 규모로 결코 작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과 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부는 전시 중인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낮은 가벽들이 서 있을 뿐, 윗 공간은 막힘없이 모두 열려 있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벽과 기둥을 없애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전시장의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보는 다른 일반적인 건물보다 더 잦은 빈도로, 더 깊은 폭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다. 마치 스트라이프 패턴을 만들고 싶어한 것처럼, 건축가는 기둥 없이 천장을 받치기 위해 커질 수밖에 없었던 많은 보들을 조형적 요소로 다시금 치환해 공간에 데리고 들어왔다.



그 덕분인지 스페이스K의 전시장은 기이한 공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시장은 얼핏 한 눈에 들어와 작은 갤러리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작품 앞에 서면 높은 층고 탓에 다시금 거대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둥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작품을 즐기는 데에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순서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이후 기획되는 스페이스K의 전시의 형태 또한 얼마든지 정해진 한계가 없이 자유로울 것이다.





월간 샘터 2022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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