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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Aug 29. 2022

만화와 시간의 방

그래픽

어렸을 때 동네에는 책방이 정말 많았다. 도서대여점이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모두들 그냥 책방이라고 불렀고, 책방은 사장님들의 취향대로 모두 개성이 넘쳤다. 비디오 대여와 함께 만화책과 소설책도 빌려주던 곳, 작은 면적이더라도 책을 빼곡하게 쌓아두고 빌려주던 곳, 여러 겹의 바퀴 달린 책장으로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며 다른 곳에선 보지 못한 만화책들을 빌려주던 곳까지. 동네에서 취향에 맞는 책방을 골라 다녔고, 친구들도 각자의 단골 책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는 책방들의 전성시대가 지난 것인지, 책방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책방은 세탁소가 되기도 하고, 편의점이 되기도 하고, 카페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동네에 책방이 모두 사라지자 나의 만화책 시대도 그렇게 저물어 가는 것 같았다. 종이 책을 옆에 잔뜩 쌓아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던 때는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지고, 이제는 출퇴근길에 잠깐씩 웹툰을 손가락으로 내려 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잊지 않고 그때 그렇게 만화책을 읽었던 기억을 다시금 세상 밖으로 꺼내 놓기로 한 모양이다. 경리단길 뒤편에 위치한 그래픽의 이야기다.




창이 없는 내향적인 건물



누군가는 조각 케이크 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책이 빼곡하게 꼽혀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아니면 건물이 여러 겹의 흰색 망토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 그래픽의 외관을 마주했을 때 나는 러시아의 전통인형인 '마트료시카'가 떠올랐다. 인형 안에서 또 다른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처럼 여러 개의 원통형 건물이 겹쳐 숨어 있는 것과 같은 외관은 그 자체의 조형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창이 없는 건물을 구현해 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만 했다.



건물에 창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환기와 채광을 위해 건물에 구멍을 내는 행위를 아예 배제하기는 힘들다. 아마 어디론가 숨겨진 창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건물 외관에서 창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잘 숨겼다는 이야기다. 그래픽의 경우 옆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막아 그래픽 내부에 비치된 서적에 직사광선이 닿지 않도록 하고, 대신 건물의 모양에 따라 생기는 천장의 간격을 통해 천창을 설치했다. 하루가 지나감에 따라 천창을 통해 햇빛이 드나들지만, 미세하게 조금씩 변화하는 조도는 사람들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나간다.



사람의 시선이 곧장 닿는 위치에 외부가 보이지 않으니, 방문객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레 그래픽의 공간을 두르며 비치되어 있는 만화책들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복도를 지나며 자연스레 방문객들은 천창 아래의 책장으로 시선을 두게 된다. 건물의 외형처럼 둥근 동선을 만들어 내자 그래픽은 원래 가지고 있는 면적보다 더 개방적으로 느껴지고 곡선의 동선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다른 건물들처럼 외부의 풍경을 공간 내부로 끌어오고자 하지 않았고, 주변의 다른 환경들과 교감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말하면 외부와 차단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내향적인 이 건물 안에서 나는 오히려 예상치 못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종이의 질감을 닮은 타일들로 몇 겹이나 감싸진 건물 안에서 만화책의 검은 잉크와 활자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그래픽의 공간은 외부의 다양한 자극들을 대신 막아준다.




술 마시는 만화방


때때로 웹툰과 웹소설의 시장이 거대해졌다는 기사를 접하면서도, 주변에서 만나질 못하니 실감할 수가 없었다.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픽을 방문하면서 자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만화책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나게 될 줄이야.



입장료를 내고 그래픽 내부로 들어서자, 만화의 세계로 떠나는 발걸음을 방해하는 요소가 한 가지도 없었다. 시간당으로 돈을 받는 것도,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영시간 안에서 얼마든지 머물 수 있었고, 기본적으로 물과 커피 등의 음료들은 모두 입장료 안에서 무료로 제공되었다. 술 마시는 만화방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홍보가 되었지만, 굳이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주문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물론 맥주와 위스키와 함께하는 만화는 훌륭했지만 말이다.


소파에 몸을 던지듯 누울 수도 있었고, 큰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해 앉아 있을 수도, 천창 아래 벤치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각자 선호하는 독서의 형태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래픽은 최대한 다양한 자세와 환경을 제공한다.




만화 드래곤볼 안에서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공간인 그곳에서는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부에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 오래 머물러도 바깥의 시간으로는 아주 잠깐일 뿐이다. 손오공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는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가 훈련을 하곤 했는데, 그래픽은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잠시 빗겨 나와 시간의 흐름을 잊고 다른 세계로 몰입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월간 샘터 2022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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