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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Dec 20. 2016

향기를 만지는 시간

2016년을 보내는 소수의 송년회

01 같이 사는 식물들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나는 철저히 식물에 관해 문외한이었다. 선물 받은 선인장도 결국 죽어서 날 떠나갔고, 선물 받은 꽃도 매일 물을 갈아줘야 하는지 몰랐어서 그대로 방치한 끝에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소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정도였고 알고 있는 꽃이라곤 장미, 튤립, 무궁화가 전부였다. 식물을 정성 들여 키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무엇이 좋은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로 식물이 한 트럭(과장해서 한 트럭이라고 하자.) 도착했다. 내 머리 위에도, 옆에도, 뒤에도 모두 식물이 자리 잡았다.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것들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이웃이 되고, 나는 꽤나 바빠졌다. 열흘에 한 번, 정글처럼 자리 잡은 큰 화분의 아이들에게 물을 줘야 하고 위에 걸려있는 행잉 식물도 모두 다 내려서 물에 푹 담가줘야 한다. 요새는 겨울이라 주기가 같아져서 편하지만, 여름에는 주기가 달라져서 며칠에 한 번씩 꼭 날짜를 확인해야 했다.


(좌 : 소수 건축 사무실 / 우 : 식물 관리표)


물을 주다 보니, 어느 녀석은 꽃을 피우고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새 이파리가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알로카시아는 어느새 쭈글쭈글한 새 잎이 올라오고, 스투키는 흙과 자갈을 뚫고 빼꼼 고개를 내민다. 꽃이 폈다가 지고, 실내 환경이 힘들었는지 잎이 모두 빠져서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관심을 가지니 변화도 금세 느껴지고, 아프면 안쓰럽고 새싹이 나면 기쁘고 그렇다. 요새는 겨울이라 히터를 자주 켜놓아서 공기가 너무 건조해 미안할 따름이다. 건조하면 물을 조금 더 자주 줘야 한다.


(좌 : 조금 정신없지만, 새싹이 나는 알로카시아 / 우 : 스투키 화분에서 애기 스투키가 자라났다!)




02 그린테리어


입사하자마자 내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이런 식물들을 인테리어로 승화시키는 일이었다. 요새 그린테리어라고 흔히 부르는 장르다.


삭막한 오피스에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기 위해 발코니 부분에 식물장을 계획했다. 창밖으로 건너편 건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창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오피스의 직원들이 잠깐이라도 식물 곁에 와서 물도 주고, 쉴 수도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다.



많은 식물들(80개가 넘는다.)에게 일일이 물을 줘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한 번 수도를 열면 화분 위에 달린 수도꼭지에서 일제히 물이 나오는 시스템을 제안하여 가구를 제작했다.


https://vimeo.com/170107328

(자세한 내용은 소수 건축 홈페이지를 참고.)


이 프로젝트 이후로도 계속 그린테리어를 제안하고 있다. 관리가 어렵다고, 일단 거절하시는 분들이 더 많지만, 꼭 그린테리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부 조경도 꼭 전문가에게 맡겨 장소에 알맞은 식물들을 데리고 온다. 




03 향기를 만지는 시간


그러니까 소수 건축에서는 사실 이런 종류의 송년회를 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회사에서는 송년회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아는 리스라곤 차 리스밖에 없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뭔지 알 수 있었다. 문 앞에 걸어두는 동그란 그것.




리스를 만드는 내내 강한 향이 사무실 안을 맴돌았다. 로즈메리 향과 각종 풀냄새가 뒤섞여 머리를 맑게 했다. 손끝으로 잎들의 생김새가 만져졌고, 만질수록 향은 더 강하게 풍겨왔다. 리스를 만드는 시간은 향기를 만지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같은 종류와 양의 식물들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사람마다 만든 리스의 모양과 크기가 전부 다 달랐다, 그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처럼.


각자 만든 리스를 곁에 두고 우리가 보내온 2016년에 대해 이야기했다. 3월에 생긴 회사로서 처음 맞는 연말이었다. 갑자기 일이 몰려,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고 있지만 송년회로 인해 한 템포 쉬어갈 수 있었다. 다시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공간은 좋은 삶을 가지고 온다. 아주 작은 배려로도 건물은 많이 바뀐다. 소수의 건축가들이 하는 일은 그러한 작은 생각들을 모아 건강한 건물을 만들어 내는 것. 2017년에도 변함없이.



리스를 만들어 집에 걸어두었는데, 엄마는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향기가 난다며 매우 좋아했다. 직접 만들면, 더 강하고 짙은 향이 퍼지는데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내년에는 나의 지인들도 함께 만드는 자리가 되었으면.




소수의 송년회 1분 ver. 는 여기로, https://vimeo.com/19638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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