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送蓮花片(임금을 울린 시)
贈送蓮花片(임금을 울린 시)
贈送蓮花片 [ 증송연화편] 떠나시며 꺽어 주신 연꽃 한 송이
初來的的紅 [ 초래적적홍] 처음에는 붉디붉더니
辭枝今幾日 [ 사지금기일] 가지에서 끊긴지 벌써 며칠인고
憔悴如人同 [ 초췌여인동] 초췌해져 이 몸과 같이 되었나이다.
이 시에는 고려 충선왕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애절한 로맨스가 얽혀 있다. 고려 충선왕은 충렬왕과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이다. 어린 시절 고려의 세자로 책봉된 후 원나라로 가서 20년 이상 머물렀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서거하자 급히 고려로 귀국한 세자(충선왕)는 모친의 사망이 충렬왕의 총애를 받고 위세를 부리던 후궁(무비)의 탓이라고 믿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측근들을 숙청하는 전횡을 저질렀다. 이는 충렬왕과는 달리, 충선왕이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이자 현 황제의 조카라는 강력한 혈연적 위세를 등에 업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의 죽음과 세자(충선왕)의 전횡을 보고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원나라에 세자에게로의 양위를 통보하고 물러나게 된다. 이에 즉위한 충선왕은 의욕적으로 개혁 정치를 펴려고 노력했지만 느닷없는 즉위로 국내 실정을 잘 몰랐을 뿐 아니라, 충렬왕을 중심으로 조직된 기존 정치세력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7개월만에 하야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고 만다. 이에 충렬왕이 다시 집권하고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고려로 복귀하여 왕좌에 올랐지만, 고려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에 체류하며 편지를 통하여 중요한 국정에만 관여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학문과 서화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나,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다. 더욱이 평생 원나라 황실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지냈기에, 변방 고려보다 세계의 중심인 원나라에 체류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 외에 충선왕의 고려로 완전 귀국을 막는 남 모르는 걸림돌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충선왕에게는 숨겨진 정인(情人)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충선왕에게는 고려의 고관대작들의 딸들인 3명의 후궁이 있었고, 정비(正妃)로 원나라 황실의 핏줄로 충선왕에게는 조카뻘 되는 계국대장공주가 있었다. 이 계국대장공주의 투기가 정말로 대단해서 충선왕으로서는 고려로 귀국하더라도 정인(情人)을 동반하고 가서 공식적인 후궁으로 맞을 엄두를 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무리해서 이를 강행한들 오랜만에 귀국한 왕이 원나라의 여인을 데리고 와서 후비로 맞겠다고 했을 때 고려의 조정에서 반길 리가 없었다.
왕이 없지는 않지만 돌아와 정사를 직접 돌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자 고려의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고려의 조정에서는 왕의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충선왕이 세자 때부터 고려에서 원나라에 파견된 세자의 보좌진들이 충선왕을 오래 설득한 끝에 겨우 귀국이 결정되었다. 이는 충선왕으로서는 마음을 준 정인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충선왕이 귀국길에 오르자 못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인(情人)인 원나라 여인이 멀리까지 따라왔다. 왕은 여인을 달래서 돌려보내며 연꽃 한 송이를 따서 이별의 징표로 주었다. 며칠 길을 간 후에 어느 저녁, 그 여인이 걱정도 되고 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왕은 그를 보좌하던 익제 이제현에게 그녀를 따라가서 그녀가 어떤지 살펴보고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제현이 그녀를 찾아가니 그 여인은 상심하여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었는데 기력이 없어 말도 못하고 거동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제현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써주었다. 그 시가 위의 5언절구이다. 가지에서 꺽인 꽃처럼 사랑하는 님과 헤어진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다감하고 때로 격정적인 왕을 염려한 이제현은 그 시를 전하고 사실대로 고하면, 혹시라도 젊은 왕이 귀국길을 돌이켜 여인에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왕에게 돌아가 그 여인에 대해서 거짓으로 '여인이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 술집을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보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노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 순전한 연정을 품은 자신이 여인에게 농락당했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원나라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왕은 귀국길을 재촉하여 고려로 돌아왔다.
다음해 임금의 생일에 이제현이 술 한 잔을 따라 올리고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려 '신이 전하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엄벌을 청하였다. 충선왕이 그 연유를 물으니 이제현은 간직했던 그 원나라 여인의 시를 올리며 그녀를 만났을 때의 일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이에 이 시를 읽은 충선왕의 두 뺨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왕은 "그 때 내가 이 시를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을 힘을 다하여 돌아갔을 것이다. 공이 나를 사랑해서 거짓을 아뢴 것이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시는 효종 때 임경이 지은 현호쇄담(玄湖瑣談)에 실려 전해진다.
* 이 글은 매거진 <천년의 그리움을 길어 올리다> 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