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옥계원(玉階怨)
夕殿下珠簾 [석전하주렴] 주렴 내려진 저녁 궁전
流螢飛復息 [류형비복식] 날아다니던 반딧불이도 쉬는데
長夜縫羅衣 [장야봉나의] 긴긴 밤 홀로 앉아 비단옷을 지으며
思君此何極 [사군차하극] 그리운 님 생각 끝이 없어라
이 시는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후궁 반첩여의 슬픔을 노래한 옥계원(玉階怨)이란 시이다. 옥계(玉階)는 옥으로 만든 계단으로 궁궐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옥계원(玉階怨)은 궁중에서 느끼는 슬픔, 한 등을 뜻한다.
1, 2연은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을 설명한다. 공간적 배경은 궁전(전한 시대 장안의 장신궁)이고 시간적인 배경은 6-7월의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간이다. 시간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시어는 반딧불이이다. 연중 주로 활동하는 시기는 초여름 두 달이고 매일 저녁 9시 무렵부터 1시까지가 활동 시간이다. 따라서 2연에서 반딧불이도 쉬는 시간이란 1시가 넘은 시간이다.
3연에서 나오는 긴긴밤(長夜)은 밤의 길이가 비교적 짧은 초여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오지 않는 사랑하는 님을 잠 못들고 기다리는 여심을 도드라지게 역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단옷(羅衣)은 기다리는 님이 혹 오시는 날에 입히고 싶어서 짓는 것으로 기다림을 상징한다. 이 짧은 시가 담고 있는 정서에 깊이 공감하려면 주인공인 반첩여의 삶과 그녀가 살았던 환경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기의 반첩여>
이 시의 주인공인 한 성제의 후궁 첩여 반씨(婕妤 班氏)의 이름은 반염(班恬)이다. 그녀는 십여년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교만해지지 않고 자중하며 주변을 잘 돌보고 배려하는, 우아하고 어질고 인품이 훌륭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성제는 누이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을 방문하러 갔다가 거기서 무기(舞妓) 조비연(趙飛燕)을 만나서 한 눈에 반해버린다. 한성제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 그녀에게는 조합덕(趙合德)이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도 외모가 출중하여 합덕을 보게 된 성제는 합덕에게도 한 눈에 반해버렸다. 성제는 조비연 자매와 어울려 놀며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단번에 황후에 버금가는 지위인 소의(昭儀)에 올랐지만 조비연은 만족할 줄 몰랐다. 탐욕스러웠던 그녀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황태후 왕정군의 친족으로 황태후의 비호를 받고 있던 왕미인(미인은 당시 5등급의 궁녀의 품계)이 성제의 승은을 입어 회임을 하자 성제의 관심이 왕미인에게 쏠리고, 그녀의 숙부인 왕봉(王鳳)은 외척보정(外戚輔政)의 지위로서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황후 허씨의 언니 평안강후(平安剛侯)의 부인 허알(許謁)은 이대로 왕미인이 후계를 생산하게 되면 강력한 미래 권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기에 무당을 동원하여 굿을 해서 성제의 아이를 가진 후궁 왕미인을 저주했었다.
이 사실을 포착한 조씨 자매는 이 정보를 이용하여 허황후를 몰아낼 계책을 꾸며서 이를 황태후 왕정군에게 고변하면서 반첩여를 함께 연루시켜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황태후를 등에 업고 황궁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왕씨 세력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인 황태후는 크게 노하여 허알과 거기에 연루된 세력을 모두 색출하여 사형에 처하고 허씨 친족들을 모두 황궁에서 내몰고 말았다. 당연히 허황후도 폐위되어 소대궁(昭臺宮)으로 쫓겨 났다가 후에 사약을 받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억울하게 연좌된 반첩여도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며 버티다가 황제의 친국(親鞫)을 요청하여 겨우 황제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사여탈권을 가진 황제를 대면하게 되면 그 동안 쌓인 정에 호소하며 눈물로 무고를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반첩여는 당당하고 담담한 어조로 “신첩이 아는 세상 이치에 따르면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부귀도 하늘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 이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몸을 바르게 닦아도 오히려 복을 얻지 못하거늘 어찌 사악한 짓에 희망을 두고 그런 짓(저주 굿)을 하였겠습니까(妾知道, 死生有命, 富貴在天, 非人力所能改變, 修正尚且未能得福, 為邪還有什麼希望?)."라고 말하였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부귀도 하늘이 정하는 것(死生有命/ 富貴在天)"이란 말은 논어의 안연편에 나오는 것이다. 그녀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이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는, 글 읽은 여자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서 무속과는 거리가 먼 유가(儒家)의 상식 안에서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
반첩여의 조리있는 말에 황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반첩여는 남을 해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더러운 음모에 동조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가 급히 형리에게 명하여 반첩여의 포박을 풀게하고 그녀을 위로하자 반첩여는 그제서야 눈물을 보였다. 고문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며 성제는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성제는 그녀에게 사과의 표시로 금 백근을 하사했다고 한다.
<버려진 가을 부채(秋風扇)>
고문으로 상한 몸을 겨우 추스리며 반첩여의 고민이 깊어갔다. 허황후를 몰아내고, 황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제를 움직여서 황후의 자리에 오른 조비연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조비연이 자신을 끝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아는 반첩여는 고민 끝에 자신을 아껴주던 황태후 왕정군을 보다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다는 핑게로 황태후의 처소인 장신궁(長信宮)으로 처소를 옮겼다. 조비연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궁내 최고 권력자는 여전히 성제의 모후인 황태후였다. 따라서 반첩여는 궁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황태후의 그늘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비연의 소양궁(昭陽宮)에는 밤마다 불이 휘황찬란하게 켜지고 날마다 풍악소리가 울렸지만 장신궁의 불 꺼진 뒷방 한 구석에 누운 반첩여는 아픈 가슴을 안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름을 달래려고 글을 읽고 시를 썼는데 그 중에 한 수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바로 원가행(怨歌行)이란 '슬픔의 노래'라는 뜻의 시이다. 여름에 사랑을 받으며 주인의 품에 있으며 긴히 쓰이던 부채가 가을이 되니 버려졌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처지를 가을 부채(秋風扇)에 비유한 노래이다. 원가행의 마지막 구절인 恩情中道絶(내님의 사랑 이제 끝나고 말았네!)란 탄식이 아프게 다가온다. 이 시에 '보름달처럼 둥근 부채를 제나라 눈처럼 흰 비단을 잘라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옛 중국 회화의 둥근 부채를 든 미인은 대부분 반첩여를 그린 것이다.
반첩여가 남긴 시, 원가행(怨歌行)과 그녀의 기구한 사연은 후대의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심금을 울려서, 반첩여를 기리는 수많은 시들이 씌여졌다. 그 중 하나가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의 시인 사조(謝眺, 464 ~ 499)가 남긴 옥계원이다. 장신궁에서 슬픔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성제를 기다리며 밤 늦도록 비단옷을 짓는 반첩여를 묘사한 시이다.
<홀로 바라보는 가을달>
후에 당대의 이백은 사조의 시들을 탐독하며 사랑했는데 그 중 옥계원(玉階怨)에서 제목을 빌려오고 주렴을 모티프로 사용하여 반첩여를 기리는 또 다른 옥계원(玉階怨)을 지어 이 시가 유명해졌다.
玉階生白露 [옥계생백로] 섬돌 위 밤이슬 맺혀
夜久侵羅襪 [야구침나말] 늦도록 님 기다리다 버선발 젖어 시리네
卻下水精簾 [각하수정렴] 방에 돌아와 수정 주렴 내리려다
玲瓏望秋月 [영롱망추월] 영롱한 가을달을 홀로 바라본다
조씨 자매는 장밋빛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열흘 붉은 꽃이 없다(花無十日紅)'는 말이 이들에게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비연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그녀에 대한 한성제의 애정은 점차 시들어가고, 그 반대로 조합덕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조합덕의 침소에 들었던 한성제가 다음날 아침, 침상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어 미앙궁(未央宮)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황제의 사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황제의 복상사를 의심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조합덕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한성제의 죽음에서 타살의 흔적은 찾지 못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성제와 합방을 하였던 조합덕의 죄를 물어야 한다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에 조합덕은 억울했지만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조비연은 성제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한애제(漢哀帝)의 집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이어갔지만 애제의 이른 사망으로 실권하고, 그 동안 지은 많은 죄들이 드러나며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며 궁에서 내쳐지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슬픈 여인의 무덤(愁女墳)>
성제의 장례 후 반첩여는 궁에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성제가 살아있을 때도 장신궁에서 쓸쓸하게 세월을 보냈지만 모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는 성제를 먼 발치에서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반첩여에게는 위안이 되었었다. 하지만 궁 어디에서도 사랑하던 성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반첩여는 마음이 쓸쓸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태후 왕정군에게 한성제의 묘지기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성제의 무덤인 연릉(延陵)을 지키며 살게 되었다. 생전에 궁의 수많은 여인들이 황제의 눈길을 사로잡으려고 온갖 치장을 하고 추파를 던졌지만 흙더미 속에 묻히고 나니 황량한 들판까지 따라와 성제의 곁을 지키는 여인은 오직 반첩여 한 명뿐이었다.
북풍이 고비(戈壁)사막의 흙먼지를 몰고와 며칠씩 하늘이 보이지 않는 날들과, 살을 에는 삭풍이 몰아치며 눈을 퍼붓는 날들과, 들꽃들이 무덤 주변의 황무지를 뒤덮는 날들을 들판의 성제의 곁에서 보내기를 1년, 반첩여도 그녀가 사랑했던 성제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무덤은 황제의 무덤인 연릉(延陵) 부근에 조성되었다. 천년의 시간이 두 번 흐른 오늘날, 연릉과 반첩여의 무덤 주변의 황무지는 포도원과 밭으로 변했고 이들의 무덤은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커다란 흙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는 반첩여의 슬픈 사연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인근 사람들은 옛적부터 반첩여의 무덤을 슬픈 여인의 무덤(愁女墳)이라고 불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 이 글은 매거진 <천년의 그리움을 길어 올리다> 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