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d Aug 08. 2018

손가락 번호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다 이렇게 두꺼운 손가락으로

아내는 피아노 전공자다. 지금은 아이 셋을 키우느라 나만큼이나 두꺼운 손가락을 지닌 엄마가 되었지만. 우리가 연애할 때 나는 그 친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무겁고 두꺼운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올리며 이거는 여기, 저거는 저기 하며 가르쳐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 친구의 냉정한 한마디는 피아노와 내가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 번에 두개씩 눌려. 피아노 치지마."

차가웠다.

알아차렸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우리의 달콤한 사랑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악보를 보며 음악을 상상해 보지만 역시 상상보다는 연주다. 악보에 그려진 수많은 기호들 중 손가락 번호가 있다. 어떤 때는 그 번호에 맞춰 손가락만 움직이면 연주가 되는게 아니냐며 손가락 번호를 외워보기도 했다. 미디 프로그램이며 앱이며 사다가 연습도 해봤다. 아, 지금의 아내는 현명했던 것이다. 뭘해도 두개씩 짚히는 손가락.


바꿨다. 플룻으로. 내 언젠간 제임스 골웨이의 제자가 되리라는 맘으로 연습에 돌입한다. 마침 나는 폐활량도 좋다. 플룻에도 손가락 번호가 있었나? 아니다. 플룻은 손가락 수랑 구멍의 수가 비슷해서 그럴 필요는 없나보다. 가을이 지나고 찬바람 부는 겨울이 되었을때 나의 고질병을 깨닫는다. 나는 찬바람만 불면 기침을 심하게 한다. 어떤 때는 말도 잘 못한다. 플룻의 소리가 기침소리로 변한다.


어머니가 원망된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 때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피아노가 가구인 줄로만 아셨다. 어느 집에 가면 있는, 위에 흰 천을 짜서 올려 놓은, 질 좋은 나무로 깎은, 거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 피아노를 부러워 하셨다. 당신의 말 더럽게 안듣는 삼형제를 놓고 고민하시다 그나마 말을 좀 듣는 둘째인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려 하셨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거야!"


두고 두고 후회했다. 제임스 레바인의 손가락을 보라. 요즘은 부상 중에 있는 랑랑을 보라. 리스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거부하고 떼를 쓰던 어린 날의 나를 후려쳐서라도 학원에 보냈다면 나는 지금의 두꺼운 손가락을 요리 조리 휘두르며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


아, 후회라도 어쩌랴. 난 겨우 컴퓨터 키보드라도 간신히 외워 글을 쓰며 상상한다. 피아노 악보에 붙은 손가락 번호를 보며 상상한다.


 손목을 살짝 돌려 다음 번 손가락을 흰 건반에 올려 놓으며 쇼팽의 노래를, 리스트의 난장을, 드뷔시의 그림같은 흥얼거림을 상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